진정성 잃은 사과 분석한 '사죄 없는 사과사회' 번역 출간

"저희는 마더 리스크 약물검사 실험실에서 이뤄진 일련의 검사 업무가 현재 우리 병원의 우수성에 못 미치는 결과를 보여준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
태아 기형 유발물질을 가리기 위한 검사를 잘못해 한 가정을 파탄 낸 캐나다의 병원이 사태의 진상이 드러난 후 발표한 사과 성명의 일부다.

이 병원으로부터 '마더 리스크'라는 이름의 검사를 받은 여성은 느닷없이 코카인 양성반응이 나오는 바람에 법원으로부터 두 딸의 양육권을 박탈당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검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지만, 두 딸은 각자 다른 가족에 입양된 뒤였다.

이 성명에서 사안의 엄중함에 걸맞은 진솔한 사죄나 반성의 마음이 담겼다고 느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병원의 '우수성'을 앞세운 것이 뉘우침을 나타내기 위함인지, 결백을 주장하기 위함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조직심리학 및 보건학과 교수인 케리 쿠퍼가 작가 숀 오마라와 함께 쓴 '사죄 없는 사과사회'(원제 The Apology Impulse·미래의창)는 오늘날 진정성 없는 사과가 횡행하는 이유와 그것이 초래하는 역효과를 수많은 기업과 정치인들의 실제 사례를 통해 분석한다.

캐나다 병원의 사과는 저자들이 잘못된 사과로 든 여러 유형 가운데 '슈뢰딩거식 사과'에 해당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세계를 설명하면서 상자 속의 고양이가 측정하기 전에는 살았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다고 비유한 것처럼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결백을 주장하는 모순의 화법이다.

"미안하다고는 하는데"…염장 지르는 사과
'슈뢰딩거식'으로 사과하는 사람은 사과를 받는 사람이 그 말에 동의하리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우선 자신이 도덕적으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먼저 내세운다.

데이터 유출로 1억4천300만 명에게 잠재적인 피해를 준 에퀴팩스 최고경영자는 "저희는 데이터를 관리하고 보호하는 선두주자라고 자부합니다"라고 사과문에 썼고 삼성전자는 갤럭시 노트 화재 사건으로 수백만 대를 회수한 뒤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 저희의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먼저 자신의 장점을 말한 다음, 실패가 얼마나 드문지 알려주는 사과 방식은 피해자들에게 염장을 지를 뿐이다.

잘못된 사과는 실책을 만회하기는커녕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실책이 된다.

이리되면 사과하는 사람은 잘못된 사과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또 사과해야 하고 이미지 악화로 인한 손실과 수습에 드는 비용은 몇 배로 늘어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것이 여기에 딱 맞는 비유다.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잘못을 부정하는 또 하나의 그럴듯한 방법은 '허수아비'를 내세워 사과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2017년 승무원용 좌석 확보를 위해 내려달라는 요구를 거부하며 항의하는 승객을 과격하게 제압해 큰 물의를 일으켰던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의 최고경영자(CEO) 오스카 무뇨스는 피를 흘리고 절규하며 끌려간 승객에 대해 반성한 것이 아니라 "정원을 초과해서 예약받은 것에 대해 사과합니다"라고 초점에서 벗어난 사과를 내놓아 더 큰 분노를 야기했다.

엉뚱한 사과문이 문제가 되자 무뇨스는 이번에는 "그 고객을 '재배치(reaccommodate)'할 수밖에 없었던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라며 또 문제의 본질을 피해갔다.

대중의 분노는 폭발했고 유나이티드항공은 소비자들의 불매 운동, 주가 폭락, 당국의 조사 등으로 휘청거렸다.

무뇨스의 사례는 잘못된 기업 홍보와 위기 대응의 교과서적 사례가 됐다.

"미안하다고는 하는데"…염장 지르는 사과
전문용어를 내세워 문제의 심각성을 호도하는 것도 잘못된 사과의 대표적 유형 가운데 하나다.

항공기 추락이나 비정상적 착륙을 '활주로 이탈'로 표현하는 것은 항공업계 오랜 관행이다.

정비공이 항공기를 훔쳐 이륙한 뒤 한 시간 정도 비행하다 공항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추락한 아찔한 사건을 두고 '미승인 이륙'이라고 하거나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야기한 화학공장의 폭발사고를 '화재에서 이어진 과잉 가압(overpressurization)'이라는 전문 용어로 덮으려 한 일도 있었다.

'자기 연민'을 표출하는 사과도 문제다.

해양 석유 시추 시설에서 폭발이 일어나 여러 명이 숨지고 막대한 양의 기름이 유출된 사건과 관련해 에너지기업 BP의 CEO 토니 헤이워드는 사과 기자회견에서 "이 사태가 끝나기를 저보다 더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해 듣는 사람들의 어안이 벙벙해지게 했다.

그는 회견 말미에 "제 삶을 되찾고 싶어요"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고객 데이터 유출사건을 일으킨 에퀴팩스의 CEO는 사과 성명에 "이는 우리에게도 분명히 실망스러운 사건"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자주 있지만, 저자들은 고객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신 또는 자사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책에는 이 밖에도 잠재적 희생양을 찾아 책임을 떠넘기는 사과, 영혼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 사과, 문법적인 기교를 활용한 본질 흐리기식 사과, '안타깝게 생각한다'와 같은 상투적 문구를 동원한 두루뭉술한 사과 등 잘못된 사과의 유형들이 계속 등장한다.

물론 진정성을 담은 사과로 잘못을 만회하고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사례도 적지 않다.

저자들은 사과에 담겨야 할 핵심 요소로 '후회, 해명, 책임에 대한 인식, 뉘우침, 보상 제시, 용서 구하기' 등 6가지를 든다.

저자들은 또 SNS 시대를 맞아 특히 더 부각되는 '과잉 사과'의 무용함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사과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 사과하거나 사안의 중대성이나 심각성에 비춰 볼 때 필요 이상으로 사과하는 것은 역효과를 야기하거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중심을 잡아갈까.

저자들은 "사과 대응 계획은 복잡할 필요가 없다"면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첫째로 미안해해야 할 일인지 결정하라, 둘째 얼마나 미안해해야 할지 결정하라 셋째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결정하라.
책에는 주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사례들이 등장하지만, 잘못된 사과로 염장 지르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라는 사과인지 책임회피인지 모를 텍스트를 아직도 '전범'이라도 되는 양 되풀이하는 우리나라 기업들과 정치인들이 참고할 만하다.

엄창호 옮김. 392쪽. 1만7천원.
"미안하다고는 하는데"…염장 지르는 사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