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삼국명승도회(三國名勝圖會)》에 실린 나에시로가와 지방의 도자기 제조도.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묘사했다.  /김영사  제공
일본 《삼국명승도회(三國名勝圖會)》에 실린 나에시로가와 지방의 도자기 제조도.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묘사했다. /김영사 제공
‘올 날이 오늘이다(來日今日)/매일이 오늘이소서(每日如今日)/날은 저물었어도(日者暮亦)/샐 때까지는 오늘이다(曙益如今日)/오늘이 오늘과 같으면(今日如今日)/무슨 세상과 같을 것인가?(何世如也)’ 국어학계 원로인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80)가 현대 우리말로 번역한 ‘조선가(朝鮮歌)’의 첫째 연(聯)이다.

정 교수는 1982년 일본 국제교류기금 선임연구원으로 교토대에서 연구에 종사할 때 ‘조선가’를 처음 만났다. 문학부 언어학연구실 1층 서고에 있는 사쓰마(薩摩, 지금의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苗代川,지금의 히가시이치키) 조선어자료에서 ‘朝鮮歌’란 제목이 붙은 책을 발견했다. 4쪽으로 이뤄진 책자에는 조선 이두식 표기법을 혼합한 한자와 한글, 가타카나로 쓰인 4연의 노래 가사가 담겨 있었다. ‘조선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북 남원에서 일본으로 납치돼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했던 조선 도공(陶工)들이 대를 이어 부르던 망향(望鄕)의 노래였다. 그는 “피랍 조선인들과 그 자손들에 의해 이어져온, 망향의 괴로움과 전쟁의 혐오를 담은 이 슬픈 노래를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고 했다.

[책마을]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망향가'
《조선가》는 조선가에 관한 정 교수의 종합적 연구서다. 그가 교토대 서고에서 발견한 ‘조선가’를 현대 우리말로 완역해 풀이를 달고, 그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사료를 샅샅이 분석해 일본 도자기 문화를 융성하게 한 조선 도공들이 일본 사회에 미친 문화·경제적 영향력을 분석해 담았다.

저자는 조선 전기 간행된 악보집 《금합자보》의 평조 만대엽에 수록된 가요 ‘오나리’가 ‘조선가’의 원가(原歌)며 조선 중기 남원 지방에서 간행된 《양금신보》에 실린 ‘오나리’와도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밝혀낸다. 두 문헌에 실린 ‘오나리’와 ‘조선가’ 제1연의 유사성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그는 “조선가는 왜란 이전부터 그들의 고향에서 널리 유행하던 노래였다”며 “매일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전쟁의 아픔을 달래고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녀 전란이 많았던 한반도에서 일찍부터 널리 애창됐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노래가 적지에서 노예처럼 살아온 피랍 조선인들의 소원과 매우 부합됐을 것”이라며 “조선가가 전승된 것은 가사가 그들이 지닌 망향의 슬픔과 전쟁의 아픔을 달래줬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 책은 조선가를 부르던 조선 도공들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도 집중 조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황무지였던 나에시로가와는 조선 도공들의 도자기 마을이 생긴 뒤 크게 발전했다. 조선 도공들은 농작물 대신 도자기를 영주에게 공납으로 바쳤고, 이는 사쓰마 지방의 경제력에 크게 기여했다.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피랍된 박평의는 세계 도예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쓰마도기’의 시조 격이다. 나에시로가와에는 현재 ‘사쓰마도기 시조 박평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박평의와 함께 붙잡혀 온 심당길 가문은 대대로 ‘심수관(沈壽官)’이라는 세습명을 이어오며 지금까지도 도예를 가업으로 삼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도공, 활자공, 철공, 목공 등 수많은 조선인 기술자가 일본으로 납치됐다. 저자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화가 전기에 비해 훨씬 침체됐던 것은 이런 인적 자원의 손실이 하나의 원인”이라며 “반면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며 얻은 인적 자원으로 도자기와 활자 인쇄술, 건축 기술, 철기 제조 등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근대화의 기초를 다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임진왜란 때 납치해간 도공들이 발전시킨 일본 도자기가 서양에 알려져 대량 수출되며 많은 자금을 벌어들였다”며 “이렇게 벌어들인 자본이 바로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밑천이 됐다”고 강조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