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로이터
사진=로이터
이번주 세계 금융시장의 주인공은 단연 '금(金)'이었습니다. 지난 7일 선물(12월물) 기준으로 온스당 2089달러까지 치솟았던 시세가 돌연 1874달러까지 하락하며 단기간 9% 가까이 변동폭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난 11일에는 하루에만 6% 넘게 급락하며 7년 만에 일일 최대 하락폭을 기록하기도 했죠. 이에 '숏 포지션(가격이 하락하면 수익을 내는 상품)' 투자자들은 짜릿한 수익률을, '롱 포지션(가격이 상승하면 수익을 내는 상품)' 투자자들은 '지옥'을 맛 본 한 주였습니다.

러시아 백신 등록 발표 이후 금 '급락'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금값이 18개월 안에 온스당 3000달러까지 갈 수 있다"고 전망할 만큼 금 시세 상승은 가팔랐습니다. 올해 3월 1400달러선에서 매달 꾸준히 상승해 지난 5일 사상 최초로 2000달러마저 넘겼습니다.

그러나 2000달러를 넘긴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아 돌연 급락장이 찾아왔습니다. 러시아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세계 최초로 등록했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왜 코로나19 백신의 등장이 금값 하락을 부추겼을까요.
"세계 최초 코로나19 백신 등록" 밝히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사진=AP)
최근까지 금 시세 상승을 견인한 것은 미국 중앙은행(Fed)을 필두로 한 각국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정책이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많은 국가들이 국경 봉쇄 조치를 내렸고, 경제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죠. 이에 각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계속 화폐를 찍어서 국민들에게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새 돈을 찍어내면서 화폐 가치가 떨어졌다는 겁니다.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 가치 하락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죠. 이에 사람들은 쓰고 남은 현금을 주식시장 등 위험자산에 투자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가치를 보전할 수 있는 안전자산에 넣기 시작했죠. 그게 바로 금입니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기 전까지 각국 정부는 돈을 찍어내 경기부양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금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이 금을 사들이는 만큼 시세 상승이 지속되는 순환의 고리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산 코로나19 백신 사용을 공식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해당 백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지속적인 면역력을 형성해 준다"면서 "내 둘째 딸도 이 백신을 맞았다"고 했습니다. 자국산 백신의 효능에 대해 강력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죠.

만약 이 백신의 효능이 진짜라면 머지않아 코로나19 상황은 종식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고, 당연히 각국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 후폭풍이 닥치기 전에 지금까지 찍어냈던 화폐들을 회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금의 가격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죠. 이러한 논지에서 러시아산 백신이 금값 폭락을 불렀던 겁니다.

고심 깊어진 투자자들

러시아 연구소 백신 개발 모습/사진=연합뉴스
러시아 연구소 백신 개발 모습/사진=연합뉴스
세계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지난 11일 폭락했던 금값은 다음날 돌연 반등했습니다. 러시아산 백신의 효능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며 하락세가 멈춘 것이죠.

지난 12일 옌스 스판 독일 보건부 장관은 "러시아산 코로나19 백신은 충분한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다. 백신 투약을 너무 일찍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다"면서 "첫 백신을 만드는 것 보다 안전한 백신을 만드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사벨 임버트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원은 너무 이른 접종이 위험하다면서 "러시아 백신의 임상시험 결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고,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장도 "해당 백신이 과연 효능과 안전을 확실히 입증했는지 심각하게 의심스럽다"고 꼬집었습니다.

이 같은 소식에 금 투자자들의 고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러시아산 백신의 효과가 진짜냐, 가짜냐에 따라서 금 시세의 향방이 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러시아산 백신의 효과가 진짜인 것으로 입증된다면 금 가격은 빠른 속도로 하락할 수 있습니다. 반면 러시아가 '백신'이라고 주장하는 이 물질이 코로나19를 잡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각국 중앙은행들은 지금과 같은 양적완화 정책을 멈추기 어렵겠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투자자들의 심리는 금 선물 시세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온스당 1930~1960달러 선에서 등락을 거듭하며 박스권을 형성 중입니다. 러시아산 백신에 대한 효과 검증이 본격화됨에 따라 향방이 정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투자자들 눈치게임 시작됐다

이번 금 시세 급변동은 주식시장은 물론 비트코인 시세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부분의 금융 시장 상품, 지수들이 일제히 하락한 뒤 박스권을 형성하는 모양새입니다. '유동성 축제'를 즐기던 투자자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 것이죠.

우선 주식시장의 경우 금 시세가 하락한 이유와 같은 맥락으로 악영향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주가 상승이 '과잉유동성'에 기인한 오버슈팅(적정수준 이상의 급등)에 가까웠던 만큼, 버블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 겁니다.

물론 금과 달리 기업들의 경우 코로나19가 종식된다면 매출을 올리는데 유리해 되려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가가 실적에 비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는 상황인 만큼 아무리 영업이익이 추가 개선되더라도 지금의 주가를 뛰어 넘을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비트코인 시세도 주식시장과 같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비트코인은 공급량이 제한된 특징 때문에 '디지털 금'으로 부각받으며 최근까지 금 선물 시세와 유사한 움직임을 보여왔습니다. 금 시세와의 커플링(동조 현상)이 풀리기 전까지는 당분간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결국 이번 금값 폭락 사태는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된다면 글로벌 금융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미리 보여준 '중요한 단서'로 보입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사상 최대규모의 유동성 장세 속에서 투자자들의 '진짜 눈치게임'은 이제 시작됐습니다.

김산하 한경닷컴 기자 sanha@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