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카다만에 쌓은 일본의 '원구방루' 20km의 일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하카다만에 쌓은 일본의 '원구방루' 20km의 일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만약 여몽연합군이 일본열도 공략과 점령에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1차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한 후인 1276년에 만약 일본 막부가 계획대로 고려를 총공격했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까.

역사에서는 ‘가정(what if)’이 필요하다. 물론 역사학에서 사실을 규명하는 일은 흔들림 없는 근본이다. 하지만 ‘왜(why)’ 사건이 발생했고, 어떤 과정을 겪었고, 그런 결과를 낳았는가도 규명해야 한다. 또한 ‘어떻게(how)’ 해야 했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 같은 난세에서는 이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당시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갖춘 원나라와 고려의 대규모 연합군은 변방의 섬나라 일본 원정에서 두 번씩이나 실패하고 퇴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패인을 ‘바람(神風)’ 탓으로 몰고, 아쉬워하는 평가까지 한다. 그것이 사실일까?

전쟁의 배경과 고려의 참전 이유

전쟁의 성격을 분명하게 아는 확실한 방법은 실질적인 주체인 원나라의 정책을 살피는 것이다.(윤명철, 《한민족의 해양활동 이야기 2》)

첫째는 세계제국의 완성이라는 원나라의 정책과 쿠빌라이칸의 개인적인 야망이다. 칭기즈칸의 뜻을 실천한 2대 오고타이칸은 실제로 유럽정복의 문턱까지 도달했었다.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한 4대 칸인 쿠빌라이에게 이 과업은 일종의 숙명이었다. 그는 1270년에 몽골의 원향인 동방에서 고려의 항복을 받아냈고, 1273년에는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어 남송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 44년 만인 1279년에 멸망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남송의 배후세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인들이 지배하는 바다 건너 소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치가 작았다. 또 은, 면, 수은 등의 물품들이 있다해도, 경제적인 가치는 적었다. 그런데도 쿠빌라이칸은 왜 대규모의 연합군을 편성해서 어려운 해양전을 감수하면서 일본열도를 공격했을까? 더구나 남송이 멸망한 후인 1281년에는 2차 원정군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여몽연합군의 원정 배경과 고려의 패배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둘째는 고려를 장악하는 원나라 정책의 문제이다. 원나라가 추진한 고려정책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전략적인 가치가 약하고, 우선 과제가 아닌 고려와의 전면전을 연기시키면서 강도정부를 존속시킨 일이다. 2단계는 삼별초를 진압하고, 여몽연합군을 조직해서 일본을 공격한 일이다. 고려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원치 않은 전쟁에 동원됐지만 패배로 말미암아 많은 병력이 희생됐고, 백성들은 삼별초 공격 때 160척을 건조한 데 이어 900척을 불과 4개월 반 만에 건조하느라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또 2차 원정을 위해 1279년에도 전선을 요구받아 200척 이상이 건조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목용의 나무들이 사라져 국토는 황폐해졌을 것이고, 전비를 충당하느라 국가의 경제력은 소진됐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연합군 체제의 편성으로 고려의 군권이 자율성을 많이 상실했다는 증거들도 있다.

고려는 2차 원정에 참전할 능력이 없음을 호소했으나 결국은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2차 또한 태풍으로 인해 연합군은 대패했다. 그나마 다행히 고려인들은 많이 생존했으나, 동로군에 편입된 북방계 종족들은 일부만이 귀환했을 뿐이다. 3500여 척을 갖고 참전했던 만군(남송군) 10만여 명은 선박들과 함께 완벽하게 전멸했다. 이로써 남송은 잔재 병력과 군사력은 물론이고, 강남 지방의 경제력까지도 소진했다. 그렇다면 원나라와 쿠빌라이칸은 원정에 실패했지만, 자체전력에는 별로 손실이 없었고 정치적, 특히 대고려 정책을 추진하는데 수확이 많았다고 풀이된다.

3단계는 고려의 실질적인 지배와 친원파의 양성이다. 원나라는 이미 1258년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고, 1270년에는 동녕부까지 설치하여 현재 평안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을 빼앗았다. 또 1차 정벌 전인 1273년에 제주도에 다루가치를 파견해 목마장을 만들었다. 1280년에는 2차 정벌을 명분으로 ‘정동행성’을 설치한 후 해체하지 않은 채 무려 76년 동안 고려의 정치구조에 간섭했다. 이로써 고려는 친원파와 권문세족들이 발호하면서 자주성이 약화했고, 사회는 역동성과 자의식이 약해지면서 몽골풍들이 만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위력, 특히 해양력이 약화해 한때는 강도정부의 해안까지 공격했던 왜구가 대규모로 공격하자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고려 멸망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후유증들은 몽골에 항복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삼별초의 항쟁을 여몽군이 공동으로 진압할 때 실제로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강도정부를 대안없이 연장하려는 무신정권 세력들이나 대책 없이 출륙해서 항복한 왕과 문신귀족들은 모두 역사에 책임을 질 집단임이 분명하다.

궁금하다. 고려는 왜 이 전쟁에 참여했을까? 물론 동원된 것은 분명하지만, 충렬왕은 1차, 2차 모두 결과적으로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참전을 왕권 강화의 기회로 삼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한 면이 있지만, 주된 목적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김방경과 고려군은 상륙작전에 성공한 후에 해안방루 30km를 파괴하고 내륙으로 진군했다. 원나라의 사령관인 훈둔(忻都)조차 칭찬할 정도로 승전을 거듭했다.

일본의 대응과 승리

일본 고모다하마의 입간판. 고려는 빼고 ' 원구'의 침공만을 써놓았다.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일본 고모다하마의 입간판. 고려는 빼고 ' 원구'의 침공만을 써놓았다.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그럼 승전국인 일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의 국제관계나 원나라의 내부사정을 고려하면 피할 수도 있는 전쟁이었는데, 일본은 첫 교섭부터 사신단을 몰살시키는 등 현실을 무시한 정책들을 폈다. 이에 막부정권의 자존심과 국제 감각의 무지로 인해 참전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물론 일본은 변방의 섬나라이고, 외국과의 교류는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나라의 상인들이 혼슈 중부인 쓰루가의 객관에 머물렀을(《후꾸이(福井)현사》)정도이니, 무역은 물론이고, 국제질서 또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일본은 내부 문제로 인해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즉 가마쿠라(겸창) 막부가 천황권을 약화하고, 무사들을 통제하는데 활용하려는 기회로 삼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일본은 663년의 백강 전투 이후 오랜만에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우고, 정책의 변화를 시도했다. 또한 대규모 병사와 거대하고 기능이 뛰어난 군선들, 철포 등의 첨단 무기들이 동원한 적과 국제전을 경험하면서 군사력을 증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특히 해양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막부는 1차 전투 후인 1276년에 고려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갖고 준비 과정까지 가졌었다. 2차 전투 때에는 미리 해안에 긴 방루(방어체제)를 구축했고, 대군을 동원하면서도 소규모 해양전을 벌였다. 이렇게 상륙을 저지하면서 결국은 태풍이 불어오는 음력 7월 말까지 지연작전을 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세계 최강의 몽골군에게 승리를 거둔 일본인들은 자부심은 얼마나 커졌을까? 지금도 대마도·이끼도·규슈 북부의 해안에는 ‘원구(元寇)’라고 비칭을 쓴 승전기념물들이 서 있다. 그들은 2번의 폭풍을 ‘가미카제(신풍)’라고 부르면서, 일본을 ‘신국’이라는 자존감을 또 한 번 확신했다. 그 의식이 그 후 우리 민족에게 700년 이상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실질적인 패배자가 고려라는 사실은 명확해졌다.

만약 정벌이 성공했다면

하카다만에 쌓은 일본의 '원구방루'.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하카다만에 쌓은 일본의 '원구방루'.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다시 또 가정해 본다. 만약 일본정벌이 성공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고려는 대규모 국제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한 전승국의 위치에 선다. 상황에 따라서는 일본영토 일부를 할양받고, 관리권 일부도 위임받을 수 있다. 일본열도를 자원의 배급지 및 유리한 구조를 가진 무역 대상국으로 삼고, 후일 골머리를 앓게 한 왜구세력을 근절시킬 수도 있었다. 어쩌면 7세기 중반 이후에 좌절됐고, 지금까지도 잠재된 일본열도 진출을 실현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려 조정은 이러한 가정과 결과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닐까? 충렬왕의 참전의지와 김방경의 강경한 태도, 병사들의 용맹스러운 전투는 혹시 전후 보상단계에서 지분을 더 확보하려는 목적 때문은 아니었을까?

급팽창하면서 동북공정, 해양영토 갈등, 내정간섭 등 고압적인 외교를 하는 통일된 중국. ‘일대일로’ 정책과 아시아 해양권의 장악 등을 시도하는 중국과 전방위로 충돌을 유도하는 미국. 자존심과 진짜 실력을 갖춘 채 중국과 맞대응을 준비하는 일본. 핵을 무기로 수시로 위협을 가하는 예측불허의 북한.

이러한 난국에 처한 한국인에게 자기위안과 합리화, 관념적인 태도 등은 불필요하다. 사실을 직시하고, 자기비판에 엄정하며, 국제질서를 판단하는 능력을 되찾는 일이 시급하다. 여기에 역사의 유용성이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