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 칼럼] 지옥 길은 위선으로 포장돼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 이 서양 격언은 착한 의도에서 출발한 정책이 나쁜 결과를 초래했을 때 흔히 인용된다. 의도는 좋았지만 방법론이 틀렸다는 데 방점이 있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 비판의 초점이다 보니 실패한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의도는 착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약자를 돕는다는 정책이 역설적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경우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최근 제안하고 일부 여당 의원이 입법을 추진 중인 법정 최고이자율 인하가 딱 그렇다.

이 지사는 높은 이자 부담에 고통받는 서민을 위해 현행 연 24%인 법정 최고이자율을 연 10%로 확 낮추자고 지난달 초 176명의 여당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그를 위한 대부업법과 이자제한법 개정안을 즉각 대표발의했다. 기준금리 연 0.5%의 초저금리 시대인 만큼 고개가 끄덕여지는 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차가운 머리로 조금만 생각해보면 법정 최고이자율 인하가 서민을 돕는 게 아니라 벼랑에서 밀어버릴 수 있는 규제란 걸 이해할 수 있다.

은행 문턱을 못 넘는 저신용자들이 저축은행과 대부업체 등에서 받는 신용대출의 평균 금리는 연 20% 정도다. 높은 연체율과 조달 금리 등을 반영해 시장에서 형성된 금리가 그렇다. 이걸 당장 절반으로 깎으라는 건 대부업체 등에 상환능력이 불확실한 저신용자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말과 같다. 결국 금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급전이 필요한 서민은 제도권 금융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불법 사채시장으로 밀려날 우려가 있는 저신용자는 최대 860만 명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불법 사채시장 이용자가 물어야 하는 금리는 연 110%(2018년 기준)로,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정치인들이 이런 뻔한 시장의 이치를 모를 리 없다. 워낙 많은 연구 결과와 역사적 경험이 시장가격의 무리한 통제가 부른 폐해를 증명해주고 있기도 하다. 2018년 세계은행 연구보고서(Interest rate caps: The theory and the practice)는 최고 이자율 규제에 대해 두 가지 시나리오로 명쾌한 결론을 냈다.

‘시장금리보다 높게 설정된 이자율 상한은 약탈적 고리 대출을 막는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시장금리보다 낮은 이자율 상한은 전체 신용공급을 줄인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도 이미 300여 년 전에 “고리대금업을 규제하는 것은 고아와 미망인들로부터 돈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갈파했다.

이런 부작용이 예상되는데도 최고이자율 인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다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은 실현 가능성과 무관하게 대중으로부터 박수를 받는다. 그 박수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이다. 여당 내에서조차 과격한 최고이자율 인하 주장은 비현실적 인기몰이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이 지사는 ‘재난지원금을 30만원씩 50번, 100번 줘도 문제없다’는 주장을 펴면서는 “경제와 통계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라고도 했다. 경제정책도 정치적으로 접근한다는 얘기다.

정치인이 정치를 하는 것을 탓할 순 없다. 다만 나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되는데도 선한 의도만 앞세워 규제를 남발하는 건 무책임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우린 이미 그런 무책임한 규제의 피해를 체험하고 있다.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전·월세 인상률을 최고 5%로 규제한 것이 전세 매물의 씨를 말려 애먼 무주택자들만 발을 구르게 한다. 최근 2년간 30% 가까이 강제로 올린 최저임금은 편의점과 식당 종업원 등의 소득을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일자리를 빼앗았다.

착한 의도라는 정책일수록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 의도가 착하다고 결과까지 착하다는 보장은 없다.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나쁜 결과가 예상되는데도 착한 의도만을 내세워 밀어붙인다면 그 의도가 진짜 착한지도 의심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가 아니라 위선(僞善)으로 포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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