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광풍에도…경제관료들은 "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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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결정 전문성 실종
권력 줄서기에 집단 무기력까지
방만 재정 등 주요 정책
黨靑이 주도…부처는 실무만
정치권 뒤치다꺼리만 하는
하도급 기술자로 전락 '자초'
권력 줄서기에 집단 무기력까지
방만 재정 등 주요 정책
黨靑이 주도…부처는 실무만
정치권 뒤치다꺼리만 하는
하도급 기술자로 전락 '자초'
“나랏빚이 올해 110조원, 내년에 105조원 증가합니다. 이렇게 국가채무가 급증하게 재정계획을 세워도 되는 건가요.”
한 전직 경제부처 고위 공직자는 3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내년 예산안과 중기 재정전망을 본 뒤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정치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명분으로 나랏돈을 흥청망청 쓰겠다는 것 같은데 공무원들까지 큰 반대 없이 그 생각에 동조해도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경제 관료들이 권력에 줄서고 정치권 뒤치다꺼리나 하는 하도급 기술자로 전락한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경제 관료들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다. 초반에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무차별적인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탈원전 정책 등이 추진됐지만 반대 목소리가 경제부처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경제 관료들의 출세지향주의와 무력감은 정권 중반을 넘어선 요즘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나랏돈 풀기, 규제 일변도의 부동산 정책, 과세 원칙에 어긋나는 소수에 대한 징벌적 과세 등의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이 추진돼도 소신을 갖고 제동을 거는 경제 관료는 사라졌다. 관가에선 “문재인 정부는 경제 관료들의 무덤”이란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은 더 심해지고 있다. 대선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재명 경기지사는 “재난지원금을 50번, 100번 줘도 괜찮다”고 하더니, “국가채무가 증가하니 재정지출을 늘리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악의적인 주장”이라고까지 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끄는 국민의힘은 보수정당의 기본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아니라 기본소득을 최고 가치로 내세웠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제 관료들은 정치권의 편향적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봉사자라는 태도로 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무현 정부를 계승했다는 문재인 정부는 반대로 시작부터 경제관료를 적대시했다. “관료를 쓰면 개혁이 물 건너간다”(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는 노무현 정부 실세들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다. 2017년 김진표 당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취임 직후 “보수 정부 10년간 정부 관료들이 흘려들었던 우리의 국정 철학을 뼈저리게 느끼게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정기획위는 현 정부 국정 운영 방향의 밑그림을 그린 곳이다.
문재인 정부는 정책 방향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경제관료에게 유독 가혹했다.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김 전 부총리는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혁신성장 정책을 중점적으로 추진했지만 소득주도성장을 밀어붙이는 장하성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대립각을 세웠다. 급기야 2018년 11월 국회에서 “경제에 관한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가 있다”고 밝힌 뒤 나흘 만에 경질됐다.
여야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은성수 금융위원장 등 관료 출신 장관들이 이견을 내지 않는 것도 이런 학습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러는 사이 정치권의 정책 주도권은 커지고 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탈원전과 복지지출 확대 등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계승할 것을 밝히고 있다. 야당 대표인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마저 현 정부 정책기조와 비슷한 기본소득과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럼에도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반기를 들지 않는다. 잘못된 경제정책이 부작용을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출세를 위해, 때로는 반대해 봐야 바뀔 게 없다는 체념과 무기력 속에 ‘하도급 기술자’ 역할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재부 세제실이 대표적 사례다. 세제실은 작은 세율 변화 하나도 각 경제주체의 행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원칙과 경제 영향을 중시한다. 그런 공무원들이 요즘 정치권이 밀어붙이는 원칙 없는 세금 정책을 뒷받침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청와대가 밀어붙여 세법개정안에 반영된 ‘부자 증세’가 그랬다. 기재부는 연 10억원 이상 고소득자의 소득세 최고세율을 45%로 올리면서 “세금을 더 내게 되는 사람은 근로소득세를 내는 사람의 0.05%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고소득자 수가 적으니 더 걷어도 별 상관없다는 건 조세 원칙이 아니라 정치”라고 했다.
다른 경제부처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요즘 네이버, 카카오 등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정부 규제안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당초 공정위는 1~2년 정도 시장 상황을 지켜보며 규제 여부를 신중하게 따져볼 생각이었다. 섣불리 규제를 만들었다가는 산업 경쟁력이 약화돼 외국 플랫폼 기업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하지만 여당이 “빨리 규제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연말을 목표로 정부안을 준비 중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과거 정부에서는 정치권이 관료들의 전문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지만 최근 들어 자율성이 약화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포퓰리즘으로 폭주하는 입법부를 막기 위해서는 관료가 제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성수영/정인설/노경목 기자 syoung@hankyung.com
한 전직 경제부처 고위 공직자는 3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내년 예산안과 중기 재정전망을 본 뒤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정치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명분으로 나랏돈을 흥청망청 쓰겠다는 것 같은데 공무원들까지 큰 반대 없이 그 생각에 동조해도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경제 관료들이 권력에 줄서고 정치권 뒤치다꺼리나 하는 하도급 기술자로 전락한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경제 관료들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다. 초반에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무차별적인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탈원전 정책 등이 추진됐지만 반대 목소리가 경제부처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경제 관료들의 출세지향주의와 무력감은 정권 중반을 넘어선 요즘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나랏돈 풀기, 규제 일변도의 부동산 정책, 과세 원칙에 어긋나는 소수에 대한 징벌적 과세 등의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이 추진돼도 소신을 갖고 제동을 거는 경제 관료는 사라졌다. 관가에선 “문재인 정부는 경제 관료들의 무덤”이란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은 더 심해지고 있다. 대선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재명 경기지사는 “재난지원금을 50번, 100번 줘도 괜찮다”고 하더니, “국가채무가 증가하니 재정지출을 늘리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악의적인 주장”이라고까지 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끄는 국민의힘은 보수정당의 기본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아니라 기본소득을 최고 가치로 내세웠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제 관료들은 정치권의 편향적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봉사자라는 태도로 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反시장 입법·방만 재정·부동산 규제…"공무원은 시키는 대로 할 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경제정책을 전문 관료들에게 맡겼다.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그는 386 청와대 실세들과 번번이 충돌하면서도 신용카드 대란 직후 경제살리기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토대 마련 등을 관철시켰다. 배경에는 “정치적으로 손해지만 국가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한다”며 경제관료에 힘을 실어줬던 노 전 대통령이 있었다.노무현 정부를 계승했다는 문재인 정부는 반대로 시작부터 경제관료를 적대시했다. “관료를 쓰면 개혁이 물 건너간다”(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는 노무현 정부 실세들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다. 2017년 김진표 당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취임 직후 “보수 정부 10년간 정부 관료들이 흘려들었던 우리의 국정 철학을 뼈저리게 느끼게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정기획위는 현 정부 국정 운영 방향의 밑그림을 그린 곳이다.
문재인 정부는 정책 방향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경제관료에게 유독 가혹했다.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김 전 부총리는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혁신성장 정책을 중점적으로 추진했지만 소득주도성장을 밀어붙이는 장하성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대립각을 세웠다. 급기야 2018년 11월 국회에서 “경제에 관한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가 있다”고 밝힌 뒤 나흘 만에 경질됐다.
여야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은성수 금융위원장 등 관료 출신 장관들이 이견을 내지 않는 것도 이런 학습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러는 사이 정치권의 정책 주도권은 커지고 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탈원전과 복지지출 확대 등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계승할 것을 밝히고 있다. 야당 대표인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마저 현 정부 정책기조와 비슷한 기본소득과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럼에도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반기를 들지 않는다. 잘못된 경제정책이 부작용을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출세를 위해, 때로는 반대해 봐야 바뀔 게 없다는 체념과 무기력 속에 ‘하도급 기술자’ 역할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재부 세제실이 대표적 사례다. 세제실은 작은 세율 변화 하나도 각 경제주체의 행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원칙과 경제 영향을 중시한다. 그런 공무원들이 요즘 정치권이 밀어붙이는 원칙 없는 세금 정책을 뒷받침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청와대가 밀어붙여 세법개정안에 반영된 ‘부자 증세’가 그랬다. 기재부는 연 10억원 이상 고소득자의 소득세 최고세율을 45%로 올리면서 “세금을 더 내게 되는 사람은 근로소득세를 내는 사람의 0.05%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고소득자 수가 적으니 더 걷어도 별 상관없다는 건 조세 원칙이 아니라 정치”라고 했다.
다른 경제부처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요즘 네이버, 카카오 등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정부 규제안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당초 공정위는 1~2년 정도 시장 상황을 지켜보며 규제 여부를 신중하게 따져볼 생각이었다. 섣불리 규제를 만들었다가는 산업 경쟁력이 약화돼 외국 플랫폼 기업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하지만 여당이 “빨리 규제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연말을 목표로 정부안을 준비 중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과거 정부에서는 정치권이 관료들의 전문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지만 최근 들어 자율성이 약화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포퓰리즘으로 폭주하는 입법부를 막기 위해서는 관료가 제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성수영/정인설/노경목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