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공의에 막혀 발길 돌리는 의협 회장 >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가운데)이 4일 보건복지부와 의대정원 관련 정책 협약을 맺기 위해 서울 퇴계로 한국건강증진개발원으로 향하던 중 전공의들의 반발에 막혀 발길을 돌리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 전공의에 막혀 발길 돌리는 의협 회장 >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가운데)이 4일 보건복지부와 의대정원 관련 정책 협약을 맺기 위해 서울 퇴계로 한국건강증진개발원으로 향하던 중 전공의들의 반발에 막혀 발길을 돌리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여당과 대한의사협회가 밤샘 토론 끝에 의대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등 논란이 됐던 의료정책 논의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될 때까지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5일째 집단휴진 중인 전공의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았다며 반발하고 있어 대형 병원의 진료 차질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최대집 의협 회장은 4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정책협약 이행 합의문에 서명했다.

합의문에는 의대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일시 중단하고 코로나19가 안정된 이후 협의체를 구성해 원점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재논의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최 회장은 “정책 철회라는 용어가 포함되지 않았지만 (정책 추진) 중단 후 원점 재논의는 사실상 같은 의미”라고 했다.

전공의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전공의 70~80여 명은 이날 정부와 의협의 협약 체결을 가로막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했다. 정책 철회 문구가 포함되지 않은 데다 전공의가 협약 체결에서 배제됐다는 불만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전공의 "패싱당했다"…의사파업 미봉책에 의료계도, 여당도 '내분'

정부와 대한의사협회가 파업 철회 합의서에 서명했지만 논란이 더 커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의료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대 정원 확대 등 의료정책 추진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지만 여당 내부 일각에서 반발이 나오는 데다 15일째 집단 휴진 중인 전공의도 이번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력 반발하고 있어서다.

복지부-의협, 장소까지 바꿔가며 서명식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과 최대집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4일 오후 1시 서울 퇴계로 한국건강증진개발원 24층 대회의실에서 합의안에 서명할 예정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공의 70~80명은 건물 1층과 대회의실을 봉쇄했다. 결국 박 장관과 최 회장은 정부서울청사에서 당초 예정보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2시40분께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신설 추진 중단, 주요 보건의료 현안을 논의할 의·정 협의체 구성 등을 골자로 하는 5개 항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최 회장은 의협 회원에게 보내는 담화문을 통해 “여당은 관련 법안의 추진을 중단하고 의료계와 원점에서 정책을 재논의하고, 복지부는 협의체의 협의 내용을 벗어나 정책을 추진할 수 없도록 했다”며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강력하게 저지하는 효과를 얻을 것”이라고 했다.

복지부는 업무개시명령을 어겼다며 고발조치했던 6명의 전공의에 대해서도 고발을 취하하는 등 유화책을 내놨다. 의대생 국가시험 일자도 6일로 연기했다. 의협은 즉각 환영한다고 밝혔다.

전공의들 ‘뒤통수 맞았다’ 격앙

동네의원으로 구성된 의협은 오는 7일로 예정했던 무기한 집단 파업을 철회했다. 그러나 전공의들은 이번 합의가 최 회장의 독단적인 행동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전공의들 주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을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첩약 급여화, 비대면 진료 등도 잘못된 의료정책이라고 주장해왔다. 정부가 네 가지 의료정책을 철회한다는 것을 명문화할 것도 요구해왔다.

전공의를 대표하는 박지현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트위터에 “자고 일어났는데 나도 모르는 보도자료가. 회장(위원장)이 패싱당한 건지, 나 없이 합의문을 진행한다는 건지?”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박 위원장은 이날 오전 최 회장과의 통화에서 철회 단어가 들어가지 않으면 받아들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일부 전공의는 “전공의협회장과 상의 없이 휴지조각만도 못한 합의서에 서명했다”고 비판했다.

전공의들은 ‘정책 철회 후 원점 재검토’와 ‘논의 중단 후 원점 재검토’는 완전히 다른 뜻이라며 의협이 정부와 여당에 밀렸다고 판단하고 있다. 최 회장이 여당과의 의견 조율 과정에서 박 위원장을 배제하고 합의안에 서명한 과정이 석연찮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 회장은 “협상 전권은 내게 위임돼 있다”며 “철회라는 말이 없어 동의할 수 없다고 하지만 최종 판단은 내가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확대되는 의료계 내분

의협과 전공의 간 갈등이 의료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과 한양대병원 교수들은 이날 정부와 의협 간 협약 후 “전공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의대생과 전공의가 불이익을 받는다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도 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충남대 등의 대학병원 교수들도 앞서 전공의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학병원 등을 이끌고 있는 병원장 모임에서는 파업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사립대학교병원협회 국립대학교병원협회 대한수련병원협의회 등은 이날 공동 명의의 발표문에서 “전공의와 전임의는 진료와 수련 현장에 속히 복귀하고 본과 4학년 학생은 의사국가고시에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참여하라”고 했다.

여당에서도 불만 제기…향후 일정 험난

여당 내에서도 의협과의 합의안을 두고 평가가 엇갈렸다. 의료계와의 강대강 대치를 가까스로 봉합했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의료계에 백기 투항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향후 보건복지위원회 등 국회 내 논의 과정에서 파열음이 예상된다.

공공의대설립법을 대표발의한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한국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더 좋은 방안이 있다고 하면 법안을 심의하면서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겠다”면서도 법안 철회의 뜻은 밝히지 않았다.

지역구가 호남인 한 민주당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도 협상파와 강경파가 있다”며 반대 방침을 에둘러 밝혔다. 전북 남원과 전남 목포·순천 등 호남 지역 의원들은 의대 유치를 지역 숙원 사업으로 추진해왔다. 이수진 민주당 의원(비례)은 페이스북에 “이번 합의안은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 지역의사제 도입을 의사들의 진료 복귀와 맞바꾼 것일 뿐”이라고 반발했다.

박상익/강영연/조미현/이지현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