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잖아. 망하지 않을 만큼만 훔치면 돼.”

일본 도쿄의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는 아들 쇼타(조 가이리 분)에게 좀도둑질을 가르친다. 둘은 매일 마트와 구멍가게를 돌며 ‘세트 플레이’로 음식과 생필품을 턴다. 다 쓰러져가는 낡은 판잣집에는 할머니 하쓰에(기키 기린 분)와 오사무의 아내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 쇼타의 누나 아키(마쓰오카 마유 분)가 기다리고 있다. 가족들은 훔쳐온 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샴푸는 왜 잊었냐”는 핀잔까지 건넨다.

영화 ‘어느 가족’(원작명 ‘좀도둑 가족’)은 어느 도시 빈민층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진짜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다. 제각기 사회에서 만나 우연히 ‘가족의 형태’를 갖춰 사는 공동체의 이야기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사회가 등 돌리던 일본 빈곤층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을 휩쓴 뒤 하위 계층의 삶을 다룬 유사 영화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피도 안 섞였는데 함께 사는 이유는

영화는 이들이 어떻게 가족이 됐는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섯 명 모두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여 준다. 오사무는 건설 일용직으로 일해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고, 노부요는 공장에서 쥐꼬리 월급을 받는다. 아키는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교과서를 보고 있어야 할 쇼타는 학교 문턱조차 밟지 못한다. 월세를 낼 형편이 안되는 이들에게 하쓰에의 집과 연금은 유일한 버팀목이다. 여기에 훔친 식음료와 생필품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틴다.

‘빈곤’ 계층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경제학에서는 사회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절대적 빈곤’‘상대적 빈곤’이 있다고 정의한다. 절대적 빈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최소한 유지돼야 할 생활 수준을 산정한 금액보다 소득이 적은 경우를 말한다. 세계은행은 절대빈곤선을 하루에 1.9달러(약 2200원)로 정하고 있다. 반면 상대적 빈곤은 소득과 상관없이 각 사회의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가 누리는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영위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일본의 최저임금을 감안하면 오사무 가족은 절대적 빈곤 상태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사회 대부분의 사람과 비교하면 영락없는 상대적 빈곤 계층이다.

입에 겨우 풀칠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느 날 또 한 명의 가족이 생긴다. 여느 날처럼 물건을 훔쳐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꼬마 유리(사사키 미유 분)다. 이들은 홀로 있던 유리를 잠시 놀아주고 돌려보내려 했지만 집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유리를 거둬들여 자식처럼 키우게 된다. 경제적 이익과는 반대되는 선택이었을 뿐더러 사회적으로는 범죄 행위다. 이들은 사회를 등지고 자신들만의 ‘가족’을 꾸려 나간다.

가족에게 불어닥친 ‘실업’ 태풍

웃음을 잃지 않던 가족에게 불행은 조금씩 스며든다. 오사무는 다리를 다쳐 건설 현장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노부요는 공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한다. 회사가 어려워져 노부요와 다른 동료 중 한 명만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평소 친했던 노부요의 동료는 ‘실종된 유리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한다. 노부요는 유리를 지키기 위해 직업을 포기한다. 가족에게는 고정 수입이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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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벼랑 끝으로 몬 것은 일자리의 박탈이다. <표>를 보면 실업은 크게 △경기적 실업 △마찰적 실업 △구조적 실업 △계절적 실업 등으로 나뉜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적 실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자발적 실업이다. 노부요가 공장에서 잘린 것은 경기가 침체돼 일자리가 줄어들어 생기는 경기적 실업에 해당한다. 오사무는 부상으로 인한 실업이었지만, 건설 일용직은 계절에 따라 수요가 달라져 계절적 실업이 잦은 대표적 일자리 중 하나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족이 추억을 쌓기 위해 바다로 여행을 다녀온 뒤, 하쓰에가 눈을 감는다. 그의 죽음이 안타깝지만 사망이 공식화되는 순간 연금이 끊길 게 걱정된다. 이들은 각자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집 앞마당에 하쓰에를 묻는다. 마음이 불안해진 오사무의 도둑질도 날로 과감해진다. 구멍가게가 아니라 남의 차 유리를 깨고 비싼 물건과 가방을 턴다. 꼬마인 유리에게까지 도둑질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회의감을 느끼는 건 쇼타였다. 오사무는 심지어 “이건 워크셰어(work-share)야”라며 행위를 정당화한다. 결국 쇼타는 유리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티나게 물건을 훔쳐 도망가다가 다리를 다쳐 입원한다. 경찰이 출동하면서 이들 가족의 ‘숨겨진 비밀’이 사회에 드러난다. ‘어린 소녀 유괴’와 ‘할머니 암매장’을 저지른 가족의 이야기는 전 언론에 대서 특필된다. 노부요는 죄를 모두 뒤집어쓴 채 체포된다.

선진국인 일본에서 이런 일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이 영화를 제작했다. 가난한 가족이 연금을 계속 받으려고 할머니를 암매장한 ‘유령 연금’ 사건이다.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컸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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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경제 수준에 비해 빈부 격차 문제가 적지 않은 편이다. 국가별로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분석할 때 보는 지표 중 하나가 <그림> ‘위대한 개츠비 곡선’이다. X축은 지니계수로, 이탈리아 인구통계학자 지니가 개발한 소득 분배 지수다. 0과 1 사이에서 값이 커질수록 분배가 불균등하게 이뤄진 것으로 본다. Y축인 ‘세대 간 소득 탄력성’은 부모와 자녀의 소득이 얼마나 비슷하게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숫자가 작을수록 계층 이등이 비교적 활발하고 높으면 소득이 대물림되는 경향이 크다.

이 그림에서 일본을 보면 지니계수는 다른 국가에 비해 낮은 편이다. 그러나 소득의 세대탄력성은 전체 곡선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즉 빈부차는 비교적 작지만 계층 이동은 그에 비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랫세대가 부모 세대의 소득 수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고, 빈곤이 대물림될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적 문제에 대해 공공의 역할보다 개인의 책임을 더 중시하는 문화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가난한 가족에겐 불행도 대물림됐을까. 모든 죄를 덮어쓰고 수감된 노부요는 면회를 온 쇼타에게 친부모를 찾을 만한 실마리를 건넨다. 유리는 학대받던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쇼타는 오사무를 뒤로 하고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지막이 ‘아빠’라고 속삭인다. 유리는 오사무 가족에게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들을 기다린다. 감독은 자식마저 ‘훔쳐’ 만든 가족의 절절한 이야기를 통해 ‘진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히 ‘경제 공동체’라는 말로 서술할 수 있을까.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