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현금으로 결제하면 더 쌉니다."

지난 1월 예비신부 신 모 씨는 서울의 한 웨딩박람회에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항공권과 호텔을 묶은 신혼여행 제품을 시세보다 싸게 판다는 내용이었다. 조건은 '당일 현금 결제'. 결혼을 9개월 남긴 시점이었지만, 경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자는 생각에 당일 계약금 20만원을 내고, 일주일 뒤 잔금 240만원을 지불했다.

결혼을 한달여 앞둔 이달 초, 신 씨는 신혼여행을 떠날 수도, 경비를 돌려받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해당 신혼여행 상품을 판매한 H여행사가 23일 폐업해서다. H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어 폐업을 결정했다”며 “결제 금액(260만원)은 환불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신씨는 '항공사와 호텔 측에 금액을 환불 받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부랴부랴 항공사와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항공사와 호텔 어디에도 예약자 명단에 신 씨의 이름은 없었다. 신 씨가 경위를 묻자 H사 측은 "직원 실수로 예약을 못 했다. 사정이 어려워 개인 빚을 갚는 데 썼다"고 변명했다.

신 씨처럼 H사로부터 환불 받지 못한 피해자는 130여명. 피해액은 한 사람당 200만~600만원에 달한다. 이들은 조만간 H사 대표를 경찰에 형사고발할 계획이다. 신 씨는 "코로나19로 결혼식 일정을 미룬 것도 억울한데, 신혼여행 자금까지 몽땅 날려 답답한 심정"이라며 "여행사와 웨딩플래너 측 어디에 요구해도 피해 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은 H사에 전화와 문자를 남겼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폐업' 이유로 환불 거부

코로나19를 핑계로 '신혼여행 사기'로 의심되는 사건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코로나19로 경영 사정이 어려워 폐업한다고 한 뒤 결제금을 돌려주지 않는 수법이다.

‘신혼여행 사기’는 이전에도 끊이지 않던 범죄 유형이다. 패턴은 비슷하다. 우선 예비 신혼부부에게 '현금'으로 여행상품 결제를 유도한다. 그렇게 받은 돈은 회사 운용비로 쓰인다. 대부분은 먼저 예약받은 손님들의 항공권과 호텔을 결제하는 데 쓴다. 일종의 '돌려막기'다. H사에서 환불액을 받지 못한 피해자 A씨는 "H사 대표에게 '개인 빚에 결제금을 썼다'는 말을 듣고 황당했다"고 전했다.

이같은 법죄로 유죄 판결 받은 사례도 많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해 한 여행사 대표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는 2018년 신혼부부 132쌍에게 7억2000만원을 받고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제판에 넘겨졌다. 겸찰 수사에 따르면, 이 업체는 경영 사정이 어려워지자 피해자들에게 현금을 받고 이전 예약자의 상품을 결제하고 개인 빚을 갚는데 썼다. 다른 여행사 대표도 지난해 수원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신혼부부 54쌍에게 1억7000여만원을 받아 빼돌린 혐의다.

"피해구제 쉽지 않아"

최근에는 코로나19탓에 범죄가 더 기승을 부린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H사는 환불 요구가 빗발치자 피해자들에게 "코로나19로 여행이 취소될까 우려돼 예약을 안 했다. 코로나19가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고 알렸다.

피해 구제는 사실상 어렵다. 업체가 여행보증보험, 기획보증보험 등에 가입해도 보증한도가 2억3000만원에 불과해서다. 업체가 파업하면 피해자들은 2억3000만원을 서로 나눠가져야 한다. 피해액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결국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수단은 형사고소 뿐이다.

검찰 출신인 김종민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채무 변제 등 다른 목적을 갖고 신혼여행 제품을 팔았다면 사기죄에 해당된다”며 “결제하고 수개월 지나도록 예약조차 안 했으면 사기로 의심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어쩔수 없이 폐업한 것이라면 형사상 책임을 묻기엔 한계가 있다”며 “현금 결제를 유도할 때는 경찰 사이버안전국에 계좌번호 조회를 조회하는 등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