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온-오프(On-Off)
삶이 곧 직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사무실을 내 집이라 생각하고 지냈다는 스토리는 선배들의 흔한 무용담이었다. 월화수목금금금. 밤낮없이 업무에 매여있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그럴 때마다 육아와 가사는 온전히 아내의 몫이었다. 당시 고마운 마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미안하다. 예나 지금이나 아내는 정말 천사 같은 사람이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몇 년 전 자주 주고받았던 질문이다. 꼰대 소리를 덜 들으려면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 Life Balance)”라는 대답을 망설임 없이 해야 했다. 신조어 정도로 여겼던 단어는 어느새 직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채용 시즌마다 기업들은 매력적인 제도와 문화를 홍보하느라 분주하고, 워라밸에 대한 의지가 경영자의 중요한 덕목이 된 지 오래다. 최근에는 워라블(Work & Life Blending), 워라하(Work & Life Harmony)라는 단어도 나왔다고 한다.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고 ‘나의 시간’이 존중받고 있다. 이제 “워라밸을 즐길 준비가 됐나요?”라는 질문에 답할 때다.

개인적으로 ‘온-오프(On-Off)’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조명을 켜고 끄듯 근무시간과 개인시간을 명확히 나누자는 의미다. 3년 전 즈음, 직원들의 회사 배지 패용을 근무시간으로 제한하자는 의견을 냈다. 반듯한 정장 깃에 고정된 은행 로고는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자세마저 돌아보게 한다. 업무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퇴근 후 일상과는 거리감이 있다. 배지 하나가 얼마나 영향이 있겠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작은 개입으로 더 나은 행동을 이끄는 ‘넛지’의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쉽게도 나의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출퇴근길에도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는 담당 실무자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과 퇴근의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 경계를 각자의 의지로 자유롭게 온-오프할 수 있다면 ‘일’도 행복한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후배들을 보면 대견한 마음이 든다. 오케스트라 동호회에서 연주가가 되기도 하고, 관심분야에 대한 책을 쓰거나 유튜버로 활동하는 직원들도 있다. 훌륭한 직장인, 좋은 엄마 아빠에 더해 또 다른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은 부럽기만 하다.

나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상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주변의 소소한 장면을 스케치로 남겨보기도 한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때 스치는 풍경들은 항상 좋은 소재가 돼준다. 간혹 얼굴을 알아보고 놀라는 직원들에게는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부캐(부캐릭터)’ 생성을 통한 나름의 온-오프가 나와 주변 모두에게 즐거운 경험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