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0) 바다로 나간 신라인
항구 도시 경주의 선택
정말 그럴까?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한전(韓傳)에 따르면 진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들은 산둥(山東)이나 랴오둥(遼東) 등의 해안가에 살았던 동이족들로 뱃길을 이용해 서해를 건너왔으며, 후에는 중국 지역과 무역을 벌였다. 또 변진(가야의 전신)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건너 제주도의 주호, 일본 열도의 왜 등과 철 등을 무역했다. 그렇다면 진한을 계승한 신라는 초기부터 교역망과 해양 활동 능력이 발달했을 것이다.수도인 경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큰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가 우물과 관련된 여인(水神)과 결혼해 건국한 땅이다. 이런 신령성 때문에 ‘금성(金城·신령스러운 도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경주는 실제로는 지정학적이고 지경학적인 가치가 풍부했으며, 이는 해양 활동과 깊이 연관돼 있다.
국가 항구로 사용된 감포
경주시에서 북쪽으로 형산강을 따라가다 보면 포항 영일만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아달라왕 때인 157년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제사집단이 일본 열도를 향해 출항한 ‘도기야’가 있다. 또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을 넘어서 내려가면 감포가 있다. 면적은 좁지만 직선 거리로는 경주와 불과 20여㎞ 남짓해 국가 항구로 사용됐다. 훗날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왜적을 막기 위해 해룡이 된 수중릉과 감은사가 있다.또 경주권과 연결되는 태화강은 48.5㎞를 흐르다가 서생포 등의 포구들이 발달한 울산만으로 들어간다(윤명철 <해양역사상과 항구도시들>). 삼국사기에 따르면 4대 임금인 석탈해(昔脫解)는 왜국의 동북 1000여 리 떨어진 다파나국(多波那國)에서 출발한 상자 속에 넣어져 울산 지역인 아진포(阿珍浦)에 들어왔다. 통일신라시대에 이슬람 상인으로 추정되는 처용과 연관된 개운포와 처용암도 울산만에 있다. 이처럼 경주는 육로 교통은 불편하지만 강을 이용한 내륙 수로교통과 연결된 동해 남부에 훌륭한 외항들을 갖고 있는 해항 도시였다. 이 때문에 신라는 초기부터 해외로 진출했고, 외지 사람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동해를 건너간 초기 신라인들
박혁거세가 해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확실치 않지만, 그 시대에 왜국에서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온 호공은 훗날 재상이 됐다. 또 4대왕 석탈해는 왜와 연관된 인물인데, 즉위 3년째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바다를 건너온 외부 세력이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신라와 우호적인 이 왜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 열도의 혼슈 일대에 진출했다. 동해 중부에서 출항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형지물로 활용하면서 횡단하거나, 동해 남부에서 출항해 해류를 타고 바람을 이용하면 혼슈 남부 해안지방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에 상륙할 수 있다. 특히 영일만 지역과 이즈모 지역은 동일하게 북위 35.5도 선상에 있으므로 교류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동해와 남해 근처 해역에서 표류병을 투하한 실험 결과를 보면 겨울에는 약 40%가 시마네현 해안에 도착했다. (일본전국연안해양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