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억의 시시각각] 진화의 루트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김태억 리드컴파스인베스트먼트 대표
미국에서 1980년 시작된 바이오벤처 붐은 바로 우리나라에도 전파돼 LG가 1985년 미국에 바이오의약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0년대에는 매년 연평균 약 20여 개의 바이오벤처 기업이 창업했고 연간 벤처캐피탈(VC) 투자금액은 2000억 원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창업 붐이었다.
1990년대
비슷한 듯 달랐던, 바이오벤처 붐 초기
미국은 창업 붐 이후 9년 만인 1989년 빈혈치료제인 에포젠 출시를 비롯해 65개의 바이오의약품이 승인됐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2000년까지 매출 실적이 거의 없었으며, 창업한 지 20년이 지난 바이오의약품 기업 중 연 매출 200억 원 기업은 2개에 불과했다. 물론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암젠과 제넨텍의 폭발적인 성장, 대형 인수합병(M&A) 사례들이 전해지면서 바이오에 대한 기대심리는 계속 높아졌다.
닷컴버블 붕괴로 촉발된 2000~2002년 금융위기로 3년 이상 어려움을 겪었던 미국(150개 기업 파산)과는 달리 한국 바이오 시장은 2002년 한 해(폐업율 2%)를 제외하고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2005년 기술성평가 특례상장 제도가 마련되면서 매년 5개 내외의 기업이 코스닥시장에 상장되었고, 우회상장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2008년에 있었던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초래된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2010년까지 총 61개 바이오 벤처기업이 상장됐고, 이들 기업의 시가총액은 8조 원 정도에 달했다. 2000년대 초기
버블은 꺼지고 실적 살아난 미국
미국은 1990~2000년까지 벤처투자 금액이 연간 170%까지 치솟은 이후 2001년부터는 그 절반 수준인 67%로 하락했다. 뿐만 아니라 나스닥 IPO에 성공한 기업도 2000년 67개로 정점을 찍은 후 2010년까지 평균 15개 내외로 줄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2002년 시장의 버블이 내려앉은 것과는 달리 65개의 재조합 단백질과 항체 신약을 출시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7개 제품이 블록버스터급 매출을 달성했다. 버블은 꺼지고 실적은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이뤄졌고, 그 결과 우수한 소수의 기업에 자본이 집중되면서 2010년까지 총 30개의 블록버스터급 항체 치료제 출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2002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미국 바이오 시장의 버블붕괴는 바이오 생태계의 진화를 촉진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바이오 버블붕괴를 통해 다수의 바이오 기업 간 M&A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중반에는 빅파마와의 공동연구 확대, 블록버스터급 제품을 출시함으로써 그 가치를 입증했다.
특히 1990~2000년대에는 항체, 단백질 재조합, 유전자 치료제, 핵산 치료제, 줄기세포 치료제 등 다양한 모달리티(혁신 치료법)들이 백가쟁명을 벌이다가 항체 치료제를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기간에 미국 바이오벤처 생태계에서는 190여 건에 이르는 M&A, 대기업 제약사의 피인수 등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바이오 투자는 IPO를 통한 것보다 3배 높은 규모의 M&A를 통해 투자금 회수가 이뤄졌고, 자본조달 경로는 벤처캐피털 투자(10%), 얼라이언스(50%), IPO를 통한 자본조달(40%) 등으로 다양해졌다.
2010년대 초기
투자 버블은 빠르고, 기술적 성장은 느렸던 한국
2011년부터 연달아 3개의 줄기세포 치료제 국내 출시, 젬백스 항암백신 임상 3상 진입, LG화학의 성장호르몬 3상 성공 등으로 바이오신약 투자 성과가 가시권 내에 들어왔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여기에 셀트리온, 삼성, 한화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바이오시밀러 산업에 진입한 것 역시 바이오 열풍이 성장세를 거듭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호재성 실적은 바이오 전반에 대한 투자심리를 높이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실제 매출로 이어지지 못해, 해당 기업들의 자금력이나 기술적 성장 역량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실적 증명에 따른 버블의 주기적 변동, 그에 따른 M&A나 기업퇴출이 일어나지 않고 버블 상황의 정체가 지속됐다.
특히 바이오의약 분야는 산업 특성상 10여 년 이상 최소 1조원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다. 기업의 자금 조달능력은 생존과 성장의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IPO를 통해 시장에 진입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지속적인 자본조달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고 주가가 지속적으로 높게 유지되면 오히려 자본조달 기능이 취약해진다.
2010년대
위기를 기회로!
미국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생태계 진화는 2010년대에도 지속됐다. 2010년 이후 미국 바이오의약품 업계는 재조합 단백질 의약품에 이어 항체 치료제 특허 만료가 다가오는 동시에 신규 진입하는 항체 의약품의 개수는 줄어들면서 연구개발 생산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기술 혁신의 선도자와 벤처캐피털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또 한 차례의 버블붕괴를 경험한 바이오 벤처캐피털들은 신약개발 생산성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모달리티를 중심으로 과감한 투자를 선도했다. 그 결과 한 해에 67개 업체가 나스닥에 상장했던 2000년의 기록을 넘어 2014년에는 총 72개 업체가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차세대 바이오 신약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에 대한 벤처캐피털 투자는 2010년 총 30억 달러 규모에서 2019년 300억 달러로 10배 이상 급증했는데, 이는 초기 창업 붐이 일어났던 1980년대의 벤처캐피털 투자증가율 500%에 비해 적어도 두 배 이상 높은 것이었다.
2010년대 후기
도약을 시작한 바이오의약품
2010년대 한국 바이오의약품 분야에 대한 벤처캐피털 투자는 2009년 638억 원에서 2016년 4686억원, 2018년 7000억 원 규모로 지속 성장했다. 줄기세포 치료제 출시 이후 뚜렷한 실적이 없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의 실적 약진을 바라보면서 기대심리가 유지됐던 것이다.
대규모 기술수출 11건을 돌파한 2015년 이후 2019년까지 3000억 원 이상 기술수출 25건(바이오의약품 9개), 누적 계약금액 24조8873억 원을 달성했다. 기술수출액 기준 연평균 100% 성장을 거듭한 것이다. 1990년 이후 30여 년간 실적 부재로 끊임없이 버블 논란에 시달려왔던 우리나라에서 기술수출 1조 원은 대형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매년 신기록을 경신함으로써 일시적인 성과가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한 실적이 계속되리라는 기대감을 낳았다. 그 결과 2019년 벤처캐피털 투자액은 1조 원을 돌파했고, 그 과정에서 미국과 유사 혹은 동등한 수준의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모달리티로 무장한 소위 2세대 바이오 벤처기업들이 창업하거나 코스닥시장에 신규 입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동시에 2019년은 그동안 높은 주가를 지탱하던 대형 임상 3상 파이프라인들이 실패하거나 허가 취소된 시기였다. 2015년 이후 진행됐던 기술수출 중 24%가 계약 해지됐다. 해외임상 진입이나 기술수출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현재와 앞으로
아직 부족해! 경쟁력 확보가 관건이다
KRX 헬스케어 지수의 흐름을 보면 2015년과 2016년 사이 기술수출이 계속 증가하는 시점에 오히려 주가는 하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후 3건의 해외 임상 3상 파이프라인의 결과 발표를 앞둔 2018년까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임상 결과를 예감이라도 한 듯이 주가 하락이 먼저 시작됐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기업경쟁력, 파이프라인 경쟁력 보다는 버블의 움직임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 바이오의약품 기업들의 유상증자 실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매년 유상증자를 통한 자본조달 실적은 1500억 원 내외에 불과했다. 벤처캐피털 투자금액 연간 1조 원 시대에 유상증자 실적이 이렇게 낮은 것은 현재의 바이오 자본시장 혹은 바이오 기업들의 장기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의 바이오산업을 위한 방법은 두 가지다
2010년대 하반기에 이어진 대형 라이선싱 성과와 함께 새로운 모달리티에 기반한 신생 벤처기업 창업,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2세대 바이오 벤처의 등장은 늦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생태계의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반가운 신호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신약 개발은 10년 이상, 1조 원 이상의 투자가 이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다. 라이선싱을 통해서 거둘 수 있는 수익은 1조원 규모의 계약이라 할지라도 매년 연간 영업익 200억 원 내외의 수익을 보장해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형 제약기업 영업이익은 1000억 원을 넘지 못하며, 대부분의 바이오 벤처기업은 영업이익은 고사하고 매출액 200억 원을 넘는 경우조차 극히 드물다. 제약기업 영업이익 전체를 연구개발 투자에 쏟아 부어도 한 개의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기도 힘든 게 우리나라 바이오·제약 기업들의 현실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라이선싱 외에 현실적인 대안이 없으며, 당분간은 라이선싱 가능한 파이프라인에 집중 투자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주장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생태계 진화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나라 바이오의약품 산업 생태계의 진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방향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 이미 상장된 기업을 중심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이루거나 혹은 자본조달 능력을 확대해서 더욱 공격적인 라이선싱, 혹은 빅파마와의 공동개발을 통해 자기자본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2세대 바이오 벤처 창업을 넘어서 3세대, 4세대 벤처 창업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모달리티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적인 혁신 흐름을 주도할 모험적인 투자가 활성화돼야 한다.
라이선싱을 통해 기술력을 입증한 기업들은 유상증자 등을 통해 더 큰 자본을 조달해 연쇄 라이선싱에 필요한 파이프라인을 확보해야 한다. 연쇄 라이선싱이 어렵다면 이미 글로벌 빅파마 대열에 합류한 중국의 거대 제약사와 함께 공동임상, 공동 마케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도 아니라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후기 임상 전문 대형 펀드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해서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레이저 헬스케어, 블랙스톤, 오비메드, MPM캐피털 등이 후기 임상 파이프라인 전문투자사들이며 중국의 그랜드 차이나헬스케어, 미국의 로열티파마, 싱가포르의 아슬란, 중국의 더에베레스트 등이 공동 임상 개발 및 공동 마케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고 있는 자본력이 풍부한 기업들이다.
이런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생태계 진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체는 벤처캐피털과 코스닥으로 상징되는 IPO 시장이다. 풍부한 자금 규모를 바탕으로 후기 파이프라인을 활용한 해외시장 진출용 펀드로 전문화하거나 혹은 미국의 아틀라스, 플래그십, 디어필드처럼 차세대 모달리티 기반의 기획 창업으로 전문화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생태계 진화 2.0 시대는 생각보다 더 빨리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김태억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의 사업본부장을 거쳤다. 본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국내 신약개발 프로젝트 전반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업단이 지원한 신약후보 물질을 해외 빅파마로
라이선싱을 하거나 해외로부터 우수 물질을 도입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글로벌 시장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신약 후보물질을 조기에
발굴해 창업하고 육성하는 바이오 전문 벤처캐피털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
비슷한 듯 달랐던, 바이오벤처 붐 초기
미국은 창업 붐 이후 9년 만인 1989년 빈혈치료제인 에포젠 출시를 비롯해 65개의 바이오의약품이 승인됐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2000년까지 매출 실적이 거의 없었으며, 창업한 지 20년이 지난 바이오의약품 기업 중 연 매출 200억 원 기업은 2개에 불과했다. 물론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암젠과 제넨텍의 폭발적인 성장, 대형 인수합병(M&A) 사례들이 전해지면서 바이오에 대한 기대심리는 계속 높아졌다.
닷컴버블 붕괴로 촉발된 2000~2002년 금융위기로 3년 이상 어려움을 겪었던 미국(150개 기업 파산)과는 달리 한국 바이오 시장은 2002년 한 해(폐업율 2%)를 제외하고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2005년 기술성평가 특례상장 제도가 마련되면서 매년 5개 내외의 기업이 코스닥시장에 상장되었고, 우회상장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2008년에 있었던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초래된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2010년까지 총 61개 바이오 벤처기업이 상장됐고, 이들 기업의 시가총액은 8조 원 정도에 달했다. 2000년대 초기
버블은 꺼지고 실적 살아난 미국
미국은 1990~2000년까지 벤처투자 금액이 연간 170%까지 치솟은 이후 2001년부터는 그 절반 수준인 67%로 하락했다. 뿐만 아니라 나스닥 IPO에 성공한 기업도 2000년 67개로 정점을 찍은 후 2010년까지 평균 15개 내외로 줄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2002년 시장의 버블이 내려앉은 것과는 달리 65개의 재조합 단백질과 항체 신약을 출시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7개 제품이 블록버스터급 매출을 달성했다. 버블은 꺼지고 실적은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이뤄졌고, 그 결과 우수한 소수의 기업에 자본이 집중되면서 2010년까지 총 30개의 블록버스터급 항체 치료제 출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2002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미국 바이오 시장의 버블붕괴는 바이오 생태계의 진화를 촉진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바이오 버블붕괴를 통해 다수의 바이오 기업 간 M&A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중반에는 빅파마와의 공동연구 확대, 블록버스터급 제품을 출시함으로써 그 가치를 입증했다.
특히 1990~2000년대에는 항체, 단백질 재조합, 유전자 치료제, 핵산 치료제, 줄기세포 치료제 등 다양한 모달리티(혁신 치료법)들이 백가쟁명을 벌이다가 항체 치료제를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기간에 미국 바이오벤처 생태계에서는 190여 건에 이르는 M&A, 대기업 제약사의 피인수 등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바이오 투자는 IPO를 통한 것보다 3배 높은 규모의 M&A를 통해 투자금 회수가 이뤄졌고, 자본조달 경로는 벤처캐피털 투자(10%), 얼라이언스(50%), IPO를 통한 자본조달(40%) 등으로 다양해졌다.
2010년대 초기
투자 버블은 빠르고, 기술적 성장은 느렸던 한국
2011년부터 연달아 3개의 줄기세포 치료제 국내 출시, 젬백스 항암백신 임상 3상 진입, LG화학의 성장호르몬 3상 성공 등으로 바이오신약 투자 성과가 가시권 내에 들어왔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여기에 셀트리온, 삼성, 한화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바이오시밀러 산업에 진입한 것 역시 바이오 열풍이 성장세를 거듭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호재성 실적은 바이오 전반에 대한 투자심리를 높이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실제 매출로 이어지지 못해, 해당 기업들의 자금력이나 기술적 성장 역량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실적 증명에 따른 버블의 주기적 변동, 그에 따른 M&A나 기업퇴출이 일어나지 않고 버블 상황의 정체가 지속됐다.
특히 바이오의약 분야는 산업 특성상 10여 년 이상 최소 1조원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다. 기업의 자금 조달능력은 생존과 성장의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IPO를 통해 시장에 진입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지속적인 자본조달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고 주가가 지속적으로 높게 유지되면 오히려 자본조달 기능이 취약해진다.
2010년대
위기를 기회로!
미국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생태계 진화는 2010년대에도 지속됐다. 2010년 이후 미국 바이오의약품 업계는 재조합 단백질 의약품에 이어 항체 치료제 특허 만료가 다가오는 동시에 신규 진입하는 항체 의약품의 개수는 줄어들면서 연구개발 생산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기술 혁신의 선도자와 벤처캐피털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또 한 차례의 버블붕괴를 경험한 바이오 벤처캐피털들은 신약개발 생산성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모달리티를 중심으로 과감한 투자를 선도했다. 그 결과 한 해에 67개 업체가 나스닥에 상장했던 2000년의 기록을 넘어 2014년에는 총 72개 업체가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차세대 바이오 신약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에 대한 벤처캐피털 투자는 2010년 총 30억 달러 규모에서 2019년 300억 달러로 10배 이상 급증했는데, 이는 초기 창업 붐이 일어났던 1980년대의 벤처캐피털 투자증가율 500%에 비해 적어도 두 배 이상 높은 것이었다.
2010년대 후기
도약을 시작한 바이오의약품
2010년대 한국 바이오의약품 분야에 대한 벤처캐피털 투자는 2009년 638억 원에서 2016년 4686억원, 2018년 7000억 원 규모로 지속 성장했다. 줄기세포 치료제 출시 이후 뚜렷한 실적이 없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의 실적 약진을 바라보면서 기대심리가 유지됐던 것이다.
대규모 기술수출 11건을 돌파한 2015년 이후 2019년까지 3000억 원 이상 기술수출 25건(바이오의약품 9개), 누적 계약금액 24조8873억 원을 달성했다. 기술수출액 기준 연평균 100% 성장을 거듭한 것이다. 1990년 이후 30여 년간 실적 부재로 끊임없이 버블 논란에 시달려왔던 우리나라에서 기술수출 1조 원은 대형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매년 신기록을 경신함으로써 일시적인 성과가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한 실적이 계속되리라는 기대감을 낳았다. 그 결과 2019년 벤처캐피털 투자액은 1조 원을 돌파했고, 그 과정에서 미국과 유사 혹은 동등한 수준의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모달리티로 무장한 소위 2세대 바이오 벤처기업들이 창업하거나 코스닥시장에 신규 입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동시에 2019년은 그동안 높은 주가를 지탱하던 대형 임상 3상 파이프라인들이 실패하거나 허가 취소된 시기였다. 2015년 이후 진행됐던 기술수출 중 24%가 계약 해지됐다. 해외임상 진입이나 기술수출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현재와 앞으로
아직 부족해! 경쟁력 확보가 관건이다
KRX 헬스케어 지수의 흐름을 보면 2015년과 2016년 사이 기술수출이 계속 증가하는 시점에 오히려 주가는 하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후 3건의 해외 임상 3상 파이프라인의 결과 발표를 앞둔 2018년까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임상 결과를 예감이라도 한 듯이 주가 하락이 먼저 시작됐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기업경쟁력, 파이프라인 경쟁력 보다는 버블의 움직임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 바이오의약품 기업들의 유상증자 실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매년 유상증자를 통한 자본조달 실적은 1500억 원 내외에 불과했다. 벤처캐피털 투자금액 연간 1조 원 시대에 유상증자 실적이 이렇게 낮은 것은 현재의 바이오 자본시장 혹은 바이오 기업들의 장기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의 바이오산업을 위한 방법은 두 가지다
2010년대 하반기에 이어진 대형 라이선싱 성과와 함께 새로운 모달리티에 기반한 신생 벤처기업 창업,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2세대 바이오 벤처의 등장은 늦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생태계의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반가운 신호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신약 개발은 10년 이상, 1조 원 이상의 투자가 이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다. 라이선싱을 통해서 거둘 수 있는 수익은 1조원 규모의 계약이라 할지라도 매년 연간 영업익 200억 원 내외의 수익을 보장해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형 제약기업 영업이익은 1000억 원을 넘지 못하며, 대부분의 바이오 벤처기업은 영업이익은 고사하고 매출액 200억 원을 넘는 경우조차 극히 드물다. 제약기업 영업이익 전체를 연구개발 투자에 쏟아 부어도 한 개의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기도 힘든 게 우리나라 바이오·제약 기업들의 현실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라이선싱 외에 현실적인 대안이 없으며, 당분간은 라이선싱 가능한 파이프라인에 집중 투자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주장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생태계 진화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나라 바이오의약품 산업 생태계의 진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방향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 이미 상장된 기업을 중심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이루거나 혹은 자본조달 능력을 확대해서 더욱 공격적인 라이선싱, 혹은 빅파마와의 공동개발을 통해 자기자본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2세대 바이오 벤처 창업을 넘어서 3세대, 4세대 벤처 창업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모달리티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적인 혁신 흐름을 주도할 모험적인 투자가 활성화돼야 한다.
라이선싱을 통해 기술력을 입증한 기업들은 유상증자 등을 통해 더 큰 자본을 조달해 연쇄 라이선싱에 필요한 파이프라인을 확보해야 한다. 연쇄 라이선싱이 어렵다면 이미 글로벌 빅파마 대열에 합류한 중국의 거대 제약사와 함께 공동임상, 공동 마케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도 아니라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후기 임상 전문 대형 펀드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해서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레이저 헬스케어, 블랙스톤, 오비메드, MPM캐피털 등이 후기 임상 파이프라인 전문투자사들이며 중국의 그랜드 차이나헬스케어, 미국의 로열티파마, 싱가포르의 아슬란, 중국의 더에베레스트 등이 공동 임상 개발 및 공동 마케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고 있는 자본력이 풍부한 기업들이다.
이런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생태계 진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체는 벤처캐피털과 코스닥으로 상징되는 IPO 시장이다. 풍부한 자금 규모를 바탕으로 후기 파이프라인을 활용한 해외시장 진출용 펀드로 전문화하거나 혹은 미국의 아틀라스, 플래그십, 디어필드처럼 차세대 모달리티 기반의 기획 창업으로 전문화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생태계 진화 2.0 시대는 생각보다 더 빨리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김태억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의 사업본부장을 거쳤다. 본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국내 신약개발 프로젝트 전반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업단이 지원한 신약후보 물질을 해외 빅파마로
라이선싱을 하거나 해외로부터 우수 물질을 도입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글로벌 시장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신약 후보물질을 조기에
발굴해 창업하고 육성하는 바이오 전문 벤처캐피털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