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노벨상 시즌이 지나갔다. 지난 9월 말 연구실적 통계분석 기관인 클래리베이트가 발표한 ‘노벨상급’ 인용지수를 갖춘 학자 명단에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가 포함돼 일각에서 올해는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올해도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는 없었다. 이렇게 노벨상 시즌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언제쯤’이라는 질문이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머지않아’부터 ‘아직 멀었다’까지 천차만별인데, 확실한 건 지금 당장은 아니란 거다.

그런데 이런 문답을 접할 때마다 질문 자체가 섣부른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리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매년 강의시간에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알파 입자 산란 실험 이야기를 해준다. 실험이 갖는 과학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이라는 직접적인 보상이 없었다는 사실, 실험 방법의 개념적 단순함에 비해 극도로 지루한 실제 실험 과정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훌륭한 예이기 때문이다.

알파 입자 산란 실험이란 1900년대 초 원자핵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해 원자 구조를 밝혀낸 실험을 말하는데, 기본적인 실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종종 언론에 방사선 물질로 등장하는 라돈 가스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이 알파 입자인데, 이 알파 입자들을 아주 얇은 금박지에 쏴준다. 그러고 금박지에 부딪힌 알파 입자들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많이 튕겨 나갔는지를 측정하면 된다. 밥 로스의 말을 빌리자면 “참 쉽죠?” 오늘날에는 많은 대학에서 학부생 혼자 하루 만에 할 수 있는 실험이다.

'끈기'로 밝힌 원자 구조

당시의 원자 모형에 따르면 금박지에 쏴준 알파 입자들은 전부 금박지를 통과해 직진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런데 실제로는 미량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양의 알파선이 다양한 각도로 튕겨져 나갔다. 이 결과로부터 원자핵의 존재를 어떻게 규명하는지를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라지만, 당시 알파 입자를 어떻게 검출했는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알파 입자는 양전하를 띠는 입자로, 형광물질과 충돌하면 형광물질이 깜박이며 빛을 낸다. 형광물질을 금박지 둘레에 적절하게 배치하고 얼마나 자주 깜박이는지를 세어서 알파 입자의 양을 측정할 수 있었다. 알파 입자 1개가 형광물질과 충돌할 때 나는 빛은 매우 희미하다 보니 암실에 들어가 눈이 암적응할 때까지 한참 기다린 후에 알파 입자를 눈으로 세야 했다. 알파 입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들어오면 정확히 세기가 어렵기 때문에 분당 50~100개 이상을 측정하기 어려웠고, 그마저도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에 금세 눈이 피로해졌다.

발표된 실험 결과를 보면 이런 알파 입자를 수개월에 걸쳐 수만 개에서 수십만 개 셌을 것으로 추정된다. 1분에 50개씩 셀 수 있다면 시행착오를 포함해 1만 분 이상 암실에서 현미경으로 형광판을 들여다봤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주 40시간 근무하면서 화장실도 안 가고 이것만 한다고 했을 때 꼬박 한 달의 시간이 걸린다.

이 실험으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은 러더퍼드지만 실제 실험을 수행한 것은 러더퍼드와 일하던 한스 가이거라는 물리학자와 어니스트 마르스덴이라는 학부생이다. 가이거와 마르스덴은 1만 분 이상의 시간 동안 1분 간격으로 교대 실험을 했는데, 인간의 인내심으로 해낼 수 있는 실험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여담이지만 가이거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추후에 가이거-뮐러 카운터라고 하는 방사선 검출기를 발명한 것인데, 가이거가 왜 이런 검출기를 발명하고 싶어 했을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노벨상 욕망보다 호기심 일깨워야

흥미로운 것은 이 엄청나게 지겹지만 엄청나게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러더퍼드, 가이거, 마르스덴 그 누구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러더퍼드는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기는 했으나 이 실험을 하기 전의 일이다). 이런 지긋지긋한 실험의 결과물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가이거와 마르스덴의 끈기 덕분인데, 이쯤에서 그 끈기를 지탱시켜준 동력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본 것은 아니지만, 결국 원자의 구조에 대한 원천적인 호기심 아니었을까? 노벨상을 받겠다는 공명심이 자연의 비밀을 밝혀보겠다는 호기심을 앞섰다면 이 지긋지긋함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누구나 올림픽 금메달, 아카데미 감독상, 노벨상 등 그럴듯한 꿈을 꿀 수는 있다. 그렇지만 스포츠가 됐든 예술이 됐든 과학이 됐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 없이 명예만을 좇는다면 그저 허황된 꿈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우리 과학계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성숙하려면, 노벨상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기 전에 이 자연에는 어떤 신기한 비밀이 숨어 있는가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 주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렇게 호기심 그득한 과학자들이 분야별로 한가득 있을 때쯤에서야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는 언제 나올까라는 질문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최형순 < KAIST 물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