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이 2010년 미국 조지아주 기아차 공장 방문 당시 현지 근로자와 악수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기회있을 때마다 해외 생산현장을 찾아 “최고 품질의 차량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강조했다. /한경DB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이 2010년 미국 조지아주 기아차 공장 방문 당시 현지 근로자와 악수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기회있을 때마다 해외 생산현장을 찾아 “최고 품질의 차량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강조했다. /한경DB
“2010년까지 세계 5대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납시다.”

2000년 9월 당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초대 회장의 취임 일성이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실현불가능한 발언”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1999년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연간 생산량은 213만 대, 세계 11위 수준이었다. 게다가 당시 세계 시장에서 현대차는 ‘싸구려차’의 대명사였다. 불가능에 가까웠던 꿈은 기적처럼 10년 만에 현실이 됐다. 현대·기아차는 2010년 574만 대를 판매해 세계 5위에 올랐다. 그룹도 급성장했다. 2000년 그룹 출범 당시 재계 순위 5위였던 현대차그룹은 5년 만인 2005년 국내 자산 56조원, 매출 67조원의 2위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품질 위해 2, 3협력사까지 방문

‘세계 자동차업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적(미국 시사잡지 타임)’을 일군 정몽구 명예회장이 14일 정의선 회장에서 총수 자리를 넘기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정 명예회장은 자동차산업의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시기에 정의선 회장 체제가 시급하다고 판단, 회장직을 내려놓겠다고 결정했다. 1999년 현대차 이사회 의장에 오른 지 21년 만이자, 2000년 ‘왕자의 난’ 이후 현대차그룹으로 홀로서기에 나선 지 20년 만이다.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 2월 현대차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은 데 이어 14일 현대모비스 대표이사직에서도 사임했다.

재계 관계자들은 정 명예회장의 △품질에 대한 고집 △위기를 기회로 삼는 역발상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뚝심 등이 지금의 현대차그룹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수시로 “품질은 우리의 목숨이자 기업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품질총괄본부를 발족시키고 매달 품질 회의를 주재했다.

공장을 수시로 방문해 직접 차량 밑바닥부터 문틈 사이 공간까지 하나하나 지적했다. 품질이 기대보다 못하면 생산라인을 멈추거나 신차 출시 일정을 미루기도 했다. 임원들에게 “글자 하나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올린 팔만대장경의 ‘일자삼배’ 정신으로 품질 향상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다그친 적도 있다. 1차는 물론 2차 및 3차 협력업체를 직접 찾아 품질 향상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세계적 권위의 미국 시장조사업체 JD파워의 신차품질조사(IQS) 결과를 보면 현대차는 2000년 37개 브랜드 중 34위에 그쳤지만, 2004년 7위로 수직상승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현대차그룹 3개 브랜드(제네시스, 현대차, 기아차)가 나란히 1~3위를 차지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사람이 개를 물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손으로 車바닥·문틈까지 훑은 MK…품질경영이 세계 5위 기적 일궜다

역발상 경영으로 판을 뒤집다

정 명예회장은 모두가 움츠릴 때 공격적으로 치고나가는 ‘역발상 경영’으로 현대차그룹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미국에서 ‘어슈어런스 프로그램’을 실시한 게 대표적이다. 소비자가 차를 구매한 지 1년 이내에 실직하면 차를 무상으로 반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글로벌 자동차업체가 보수적인 경영체제로 전환하던 시기에 전개된 현대차의 공격 마케팅에 대해 당시 시장에서는 “미쳤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현대·기아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2008년 4.8%에서 2011년 8.9%로 급증했다.

방향이 확정되면 좌고우면하지 않는 것도 강점으로 거론된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시장에 재도전할 당시 현대차 임원 다수는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 1989년 북미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캐나다 브루몽에 공장을 지었다가 막대한 손실을 보고 1993년에 철수했던 쓰라린 기억이 남았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을 못 잡으면 미래는 없다”며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1999년엔 ‘10년·10만 마일 품질보증’을 들고 나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5년·6만 마일 보증’이 일반적이었다. 미국 앨라배마에 생산공장까지 지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시장에 다시 뛰어들지 않았다면 현대·기아차는 내수 기업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며 “당시의 승부수가 ‘글로벌 현대차’를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은 올 2월 한국인 최초로 세계 자동차산업 최고의 권위에 빛나는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역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인물은 포드자동차 창립자 헨리 포드, 벤츠 창립자 카를 벤츠 등이다. 자동차 명예의 전당 측은 “기아차의 성공적인 회생, 세계 생산기지 확대, 고효율 사업구조 구축 등의 성과를 내 자동차업계의 전설적 인물들과 견줄 만하다”고 평가했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 7월 대장게실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3개월째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병세가 회복됐고 건강에 문제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