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벽을 허무는 정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권력 분산이라면 권위주의는 권력 집중이다. 이 때문에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의어다. 그리고 미국의 헌법 정신인 ‘다양성을 하나로(E pluribus unum)’ 만드는 타협은 민주정치의 핵심이 된다. ‘타협을 통한 일치된 의사의 도출’이 민주 정치 과정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다양성 측면에서 국민의 뜻은 항상 여럿이고 민주 선거에서 100% 지지란 존재할 수 없다. 19대 대선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는 41.08%, 홍준표·안철수 후보는 각각 24.03%, 21.41%, 유승민·심상정 후보는 각각 6.76%, 6.17%의 지지를 얻었다. 21대 총선 지역구에서 더불어민주당은 49.9%를, 미래통합당은 41.5%를 얻었다. 국민의 지지는 다양했고, 어느 정당도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런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국정에 반영하는 일이 ‘정치’다. 그러나 이 정치에 청와대와 민주당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승자독식이라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폐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586 학생운동 세력이 대결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데도 한 원인이 있다.

운동권 사고는 자신들은 ‘민주세력’으로 옳고 정의롭지만, 상대는 ‘독재세력’으로 그르고 불의(不義)하다고 보는 우적(友敵) 관계 이분법을 특징으로 한다. 상대방을 경쟁자가 아니라 적(敵)으로 인식하게 되면 정치는 각박해지고 국민은 피폐해진다. 그리고 정치는 전쟁이 된다.

운동권 사고의 또 다른 특징은 피해의식이다. 독재로부터 부당하게 억압받았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조그만 비판에도 발끈하며 반박한다. 반면 ‘제 식구 감싸기’는 정의이고 이를 비판하면 배신이 된다. 논란이 되고 있는 ‘민주화 유공자 예우법’이 좋은 예다.

정치는 국민의 복리를 위한 정책을 결정하는 행위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다. 오직 함께 잘사는 나라 만들기가 전부다. 여야도 보수와 진보도 없이 오직 국민을 위한 결정만 존재할 뿐이다.

모두들 정치가 위기라고 한다. 한국 정치의 기본 틀을 구성하고 있는 보수·진보로 양극화된 극단적 이념 갈등 속에서 윤리, 규범, 양심까지 양분화돼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있는 모습이다. 대화와 타협은 없고 밀어붙이기와 대결만 있는 데서 위기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진보·보수라는 양극화 구조 속에 운동권 사고가 대결정치를 만들어내고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목소리만 허용하는 권위주의 괴물이 돼가고 있다. 민주당이 당내에서 지도부와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야당 국민의힘에도 의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토론이 보이지 않는다.

정당 내에, 여야 사이에, 보수·진보 간에 벽이 존재하고 있다. 개천절과 한글날에 등장한 광화문 차벽은 국민과 정부 사이의 벽을 상징한다. 조선시대 임금과 백성의 언로 차단이라는 벽을 허물기 위해 존재했던 상소가 지금도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가는 슬픈 현실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권위주의 시절 공화당이나 민정당 통치와 다르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해결책은 벽을 허물고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보수는 진보를 인정하고, 진보는 보수를 인정하며 노무현식 계급장 떼고 토론이 가능한 시스템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민주 정당들 내에 다양한 정책과 의견이 토론을 통해 정제되는 절차가 일상이 돼야 한다. 여야는 대화로 타협의 물꼬를 터야 하며, 청와대는 보수 국민과의 벽을 허무는 소통 통로를 열어야 한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지난 41개월 동안 대선 캠프식의 상대방 무찌르기, 진보·보수 양극화, 운동권식 투쟁을 넘어 통합과 공존의 정치로 나아가지 못했다면 남은 기간 국민 의사가 다양한 채널로 반영되는 벽을 허무는 정치를 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 그래야 보수·진보, 여야, 국민이 하나로 뭉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무한 경쟁과 인공지능(AI)이 노동을 대체하는 탈노동 시대 미래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