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군주제 민주주의 거부…냉전시대 정치구조에 진심 어린 분노"
더 커진 빈부 격차에 불만…기성세대와 달리 군주제 맹목적 지지 안해
비상칙령·물대포에도 물러서지 않는 태국 젊은이들 왜 분노하나
2020.10.17' />


태국 정부의 강경대응에도 반정부 시위에 나선 태국 젊은이들의 분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이들은 올 2월 야당인 퓨처포워드당(FFP) 해산 직후 불붙은 캠퍼스 집회 당시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재개돼 3개월째 계속 중인 반정부 시위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 있다.

집회장에는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그리고 20~30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과거 반정부 집회에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서민층인 이른바 '레드셔츠'가 주도해 목소리를 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젊은이들은 특히 대학 캠퍼스나 공원을 벗어나 거리시위 양상까지 띠며 변곡점이 된 최근 반정부 집회에서 더욱더 많아졌다.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5인 이상의 정치 집회를 금지하는 비상칙령을 15일 발효했음에도 SNS로 소통하며 17일까지 사흘 연속 거리로 나와 "쁘라윳, 나가라"를 외쳤다.

특히 경찰이 16일 파툼완 교차로 집회를 물대포로 강제 해산하고 체포를 경고했음에도 랏프라오 네거리 등으로 자리를 옮겨 거리 보란 듯 도심 시위를 강행했다.

올 초 반정부 집회 당시 한 외신은 태국 학생들을 거론하며 'docile'이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했다.

'고분고분한' 정도로 번역된다.

그만큼 최근에는 젊은 층이 저항의 목소리를 낸 적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최근 반정부 집회를 계기로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비상칙령·물대포에도 물러서지 않는 태국 젊은이들 왜 분노하나
◇ '군부·군주제 민주주의' 거부…"냉전시대 정치 체제 진심어린 분노"
태국 젊은이들이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는 쁘라윳 총리는 2014년 육군참모총장 당시 정국 혼란을 끝내겠다며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지난해에는 총선으로 '재집권'했다.

군부 정권 연장 저지를 내세워 젊은이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제3당이 된 퓨처포워드당(FFP)은 정당법 위반을 이유로 올 2월 헌법재판소에 의해 공중 분해됐다.

이를 두고 쁘라윳 정부가 '눈엣가시'인 FFP를 정치적 동기로 해산시켰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반정부 집회 불길이 타올랐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잠시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반정부 인사 완찰레암 삿삭싯(37)이 6월 초 도피 중이던 캄보디아에서 괴한들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다 거대 부호인 레드불의 창업주 손자 뺑소니 사망사고에 대해 검찰이 7월 불기소를 결정한 것도 공분을 일으켰다.

기득권층끼리 뭉쳐 정의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8월 중순 당시 집회에 참석한 쭐라롱껀대 학생 시린 뭉차론은 온라인 매체 카오솟에 "국민 목소리는 무시되고 반정부 활동가들은 당국에 의해 탄압받는 독재에 질렸다"며 "법은 기득권층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도 진저리가 난다"고 말했다.

비상칙령·물대포에도 물러서지 않는 태국 젊은이들 왜 분노하나
15일 방콕 랏차쁘라송 네거리 집회에 한 젊은 시위대가 들고 있던 손팻말에 적힌 '군부·군주제 민주주의 반대' 문구는 젊은층의 심경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도 같은 날 사설에서 이번 반정부 시위를 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굶주림의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쭐라롱껀대 안보 및 국제문제 연구소 티띠난 퐁수티락 소장은 블룸버그 통신에 "특히 많은 젊은이가 선출된 정치인보다 군·군주·사법부에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는 냉전 시대 정치 체제하에서 국가가 어떻게 운영돼 왔는지에 대해 '진심 어린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상칙령·물대포에도 물러서지 않는 태국 젊은이들 왜 분노하나
◇ 빈부 격차는 더 벌어지는데…"세금은 국민을 위해 안쓰여"
태국은 세계적으로도 빈부 격차가 가장 큰 국가 중 하나다.

코로나19 사태로 더 심해졌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 3월 발표된 세계은행 보고서에는 빈곤층인 태국민 수가 최근 수년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쁘라윳 총리 집권 기간이다.

지난해 태국 한 경제연구소는 태국 기업 지분의 약 36%가 단 500명에게 집중돼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부의 집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가디언은 사설에서 "가장 부유한 1%가 국부의 67%를 차지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한 나라에서 엘리트층이 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14일 총리실 인근 랏차담넌 거리 반정부 집회장에서 기자가 만난 아리(가명·16)도 국민의 삶을 이야기했다.

아리는 "쁘라윳 총리는 국민들의 낸 세금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가진 사람만 혜택이 돌아가고, 대다수 태국 국민은 가난하고 힘들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의 거대한 재산이 조명을 받으면서 반정부 집회의 불길을 더 키운 측면이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은 지적했다.

왕실 재산이 구체적으로 공개된 적은 없지만, 미국 경제 기술 관련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2018년 5월 태국 왕실의 자산을 300억 달러(33조4천800억원)로 추산했다.

EFE 통신에 따르면 코로나 경기침체 와중에 내년도 왕실 예산은 16%나 인상 편성되고, 여기에는 왕실 소속 38대의 여객기·헬기 유지 비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상칙령·물대포에도 물러서지 않는 태국 젊은이들 왜 분노하나
◇ 기성세대 비해 군주제 맹목적 지지 안해…강경대응 초래 위험 내포
태국에서는 국왕은 전통적으로 신성시되는 존재인 데다, 최장 징역 15년형인 왕실모독죄가 있어 레드셔츠도 군주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층은 달랐다.

8월 초부터 정치적 금기로 여겨졌던 군주제 개혁을 공개 거론했다.

인터넷 등을 통해 여러 정보를 접하는 젊은층이다보니 기성세대에 비해 군주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쁘라윳 짠오차 정부를 개혁하려면 그 위에 존재하는 군주제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반정부 활동가 빠릿 치와락은 지난달 19일 왕궁 옆 사남루엉 광장 집회에서 "이웃집의 개가 짖는다면 여러분은 개에게 짖지 말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그 주인에게 개에게 입마개를 씌우라고 말할 건가"라고 말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 쿠데다 사후 승인 등에서 보듯 왕실이 군부와 너무 가까워 민주주의가 약화한다는 시각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젊은이들이 '브레이크 없이' 군주제 개혁을 밀어붙일 경우, 정부가 강력히 대응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점이 변수다.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이 랏차쁘라송 네거리 집회가 열린 당일 한 행사에서 "국가는 나라와 군주제를 사랑하는 국민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