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비판 의견 길들이려는 日 스가 정권의 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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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술회의 회원 후보 6명 임명 거부
비판을 용납 않는 국가주의로 치달을까
국중호 < 日 요코하마시립대 경제학과 교수 >
비판을 용납 않는 국가주의로 치달을까
국중호 < 日 요코하마시립대 경제학과 교수 >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정권이 출범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정치적 분란이 일고 있다. 지난 1일 일본학술회의가 추천한 신회원 후보자 105명 가운데 6명의 임명을 스가 총리가 거부한 것이 그 발단이다. 총리가 이 회의 추천자를 임명 거부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분란의 배경에는 이 회의의 정부 정책 비판 입장과 스가 정권의 학술회의 길들이기가 자리한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정부는 입맛에 맞는 학설을 고른 다음 그것에 반해 주창하는 학자를 배척하기도 했다. 일본학술회의 발족 동기에는 과학자들이 전쟁에 협력했다는 점에 대한 반성이 깃들어 있다. 이 회의는 국비로 운영되나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특별기관’으로 자리매김해 왔으며 과학정책 제언, 국내외 과학자 간 연계, 여론 계발을 목적으로 1949년 발족했다. 1950년과 1967년에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 연구는 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에서 군사 연구를 확대하자 일본학술회의는 2017년에도 “같은 입장을 계승한다”며 견제했다.
아베 정권으로서는 이 회의가 성가신 존재였던 터라 인사 개입에 나섰다. 회의는 21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고 임기는 6년이며 3년마다 그 반인 105명이 교체된다. 그동안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2017년 회원 교체 때도 총리를 보좌하는 내각관방(관저)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아사히 신문 2020년 10월 7일자). 관저 요청으로 당시 오오니시 다카시(大西隆) 일본학술회의 회장은 105명의 회원 교체임에도 110명이 넘는 명부를 스기타 가즈히로(杉田和博) 관방차관에게 사전에 제시했다. 내각관방이 회원 일부를 교체할 수 있는 인사 개입 여지를 심어놓은 것이다.
일본학술회의 회장이 야마기와 주이치(山極壽一)로 바뀌고 나서 올해 8월 말 105명의 신회원 후보자만 추천해 정부의 인사 개입을 차단하려 했으나, 스가 총리는 정부 정책 반대자 6명의 임명을 거부했다. 이들에 대한 임명 거부는 스가 정권의 학술회의 길들이기 속내를 내비치며 비판 의견에 대한 포용성의 한계를 드러냈다. 실제로 총리를 보좌하는 내각관방(관저) 간부는 “관저는 (야마기와가 회장일 때 교체 인원 이상의 명부를 갖고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임명 거부가 이 회의를 ‘괘씸죄’로 몰아간 처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번 임명 거부 사태는 일본 정치가 안고 있는 책임 회피의 병폐를 응축하고 있다. 스가 총리는 임명 거부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이달 5일 내각부 기자 인터뷰에서 “종합적·부감적(俯瞰的) 관점에서 판단했다”는 답변으로 두루뭉술 얼버무렸다. 책임 회피를 위한 전형적 수법이다. 스가는 가장 오래 관방장관을 지내면서 사안에 대한 친절한 설명 없이 “결론은 정당하다”는 자세를 고집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총리가 되고 나서도 그런 자세로 버티는 듯한 인상이다.
이번 사태는 일본 사회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학문과 양심의 자유가 힘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정치 권력으로 학자 길들이기에 성공한 국가주의로 향할 것인가의 분기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후자라면 일본 정치·사회의 장기 비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우려가 있다. 한국으로서도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타산지석이겠다 싶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정부는 입맛에 맞는 학설을 고른 다음 그것에 반해 주창하는 학자를 배척하기도 했다. 일본학술회의 발족 동기에는 과학자들이 전쟁에 협력했다는 점에 대한 반성이 깃들어 있다. 이 회의는 국비로 운영되나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특별기관’으로 자리매김해 왔으며 과학정책 제언, 국내외 과학자 간 연계, 여론 계발을 목적으로 1949년 발족했다. 1950년과 1967년에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 연구는 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에서 군사 연구를 확대하자 일본학술회의는 2017년에도 “같은 입장을 계승한다”며 견제했다.
아베 정권으로서는 이 회의가 성가신 존재였던 터라 인사 개입에 나섰다. 회의는 21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고 임기는 6년이며 3년마다 그 반인 105명이 교체된다. 그동안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2017년 회원 교체 때도 총리를 보좌하는 내각관방(관저)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아사히 신문 2020년 10월 7일자). 관저 요청으로 당시 오오니시 다카시(大西隆) 일본학술회의 회장은 105명의 회원 교체임에도 110명이 넘는 명부를 스기타 가즈히로(杉田和博) 관방차관에게 사전에 제시했다. 내각관방이 회원 일부를 교체할 수 있는 인사 개입 여지를 심어놓은 것이다.
일본학술회의 회장이 야마기와 주이치(山極壽一)로 바뀌고 나서 올해 8월 말 105명의 신회원 후보자만 추천해 정부의 인사 개입을 차단하려 했으나, 스가 총리는 정부 정책 반대자 6명의 임명을 거부했다. 이들에 대한 임명 거부는 스가 정권의 학술회의 길들이기 속내를 내비치며 비판 의견에 대한 포용성의 한계를 드러냈다. 실제로 총리를 보좌하는 내각관방(관저) 간부는 “관저는 (야마기와가 회장일 때 교체 인원 이상의 명부를 갖고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임명 거부가 이 회의를 ‘괘씸죄’로 몰아간 처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번 임명 거부 사태는 일본 정치가 안고 있는 책임 회피의 병폐를 응축하고 있다. 스가 총리는 임명 거부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이달 5일 내각부 기자 인터뷰에서 “종합적·부감적(俯瞰的) 관점에서 판단했다”는 답변으로 두루뭉술 얼버무렸다. 책임 회피를 위한 전형적 수법이다. 스가는 가장 오래 관방장관을 지내면서 사안에 대한 친절한 설명 없이 “결론은 정당하다”는 자세를 고집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총리가 되고 나서도 그런 자세로 버티는 듯한 인상이다.
이번 사태는 일본 사회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학문과 양심의 자유가 힘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정치 권력으로 학자 길들이기에 성공한 국가주의로 향할 것인가의 분기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후자라면 일본 정치·사회의 장기 비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우려가 있다. 한국으로서도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타산지석이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