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이미지·오브제 결합해
과거·현재 맞물린 '시간' 표현
여백 더 둔 근작 20여 점 전시
화면 하단에는 꽃인 듯 장식품인 듯 알록달록한 색의 덩어리들이 시선을 끈다. 한 화백은 최근 들어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거나 개지 않고 캔버스의 한 부분을 팔레트 삼아 작업한다. 알록달록한 색의 덩어리는 그 흔적이다. 물감 덩어리가 일종의 오브제로 화면에 남아 그 안에 그려진 이미지들이 시간의 흔적임을 암시한다. 한 화백은 서양의 명화, 한국의 산수화·풍속화·민화 등의 이미지를 빌려 일상의 오브제와 결합함으로써 과거 및 현재를 화면에 담아내는 ‘시간의 복제’ 시리즈를 40년 가까이 해왔다. ‘시간의 복제’는 과거를 재현하는 게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위한 작업이다. 전시를 앞두고 만난 한 화백은 “기성의 이미지는 시간의 이정표이자 기억의 기호”라며 “그런 기억을 끄집어내야 소통이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과거 없는 현재, 현재 없는 미래는 없으며 그 세 가지가 맞물리는 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것. 그토록 오랜 세월 시간에 주목해온 건 바로 시간이 생(生)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3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에는 근작 20여 점을 걸었다. 보스, 르네 마그리트, 고흐, 자크 루이 다비드 등의 그림과 안견의 몽유도원도, 신윤복의 풍속화,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에서 이미지를 빌렸다. 한 화백은 “이전 작품에 비해 더 많이 버리고 생략해 여백이 커졌다”며 “뭔가를 얻으면 비우고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면을 함께 구성하는 일상의 오브제들도 다양하다. 핸드폰으로 찍은 꽃 그림이 작은 병 내부를 닦는 데 쓰는 솔, 시계 태엽과 어우러진다.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여성용 화장 거울 아래에는 조선 청화백자에 담긴 그림을 앉혔다.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쪽배를 타고 유유자적 노를 젓는 백자의 그림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에서 따온 여성을 옅은 하늘색 배경 위에 배치하고 향수병 뚜껑, 나사못, 핸드폰 부품 등을 화면 전체에 점처럼 뿌려 놓았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속 벌거벗은 여인은 이불 뒤편에 숨겨 놓은 슈퍼맨 이미지를 만나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났다. 파이프를 문 고흐의 초상, 르네 마그리트의 모자는 큰 화면에서 점처럼 축소돼 있지만 단박에 시선을 끈다. 화면을 상하로 분할해 차지한 반가사유상과 시계추, 기마인물형 토기와 골프공은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게 한다. 안견의 그림에서 따온 폭포는 하늘색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그 아래에서 물을 맞이하는 건 바위가 아니라 바이올린 턱받침이다. 마릴린 먼로는 신윤복 풍속화 ‘단오풍정’의 세수하는 여인과 만나고, 한 화백이 여행 중 찍은 풍경 사진을 신윤복의 ‘연소답청’에 나오는 여인과 함께 배치하니 나들이의 느낌이 살아난다.
한 화백은 “기성의 이미지와 조형적으로 다르고 엉뚱하면서도 (이미지와) 결합되는 오브제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며 “익숙함과 낯섦의 공존에 새로운 조형미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익숙한 데 그치면 삶이 지루하고 희망이 없다는 것. 2011년 성신여대에서 정년 퇴임한 뒤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이유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이번 전시 작품에 대해 “큰 틀에서는 기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이 축소·변형·각색되는 등 새로운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며 “붓 자국을 남기지 않고 가능한 한 섬세하고 깔끔하게 그리되 사진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한만영 작업의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전시는 이달 31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