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시아의 ‘중재 허브’ 목표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18층에 마련된 KCAB 국제중재센터의 서울국제중재 심리시설에선 서울 강남 일대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을 찾는 외국인 중재인들에게 첨단 회의실 및 화상심리시설, 중재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는 중재기관 사무국의 케이스 매니저(사건 담당자)들, 우수한 중재인(판정을 내리는 전문가)과 카운슬(법률대리인)들은 서울을 국제 중재의 신흥 강자로 인식하게 해준다.한국의 국제 중재는 지난해 한 개 사건이 해결되는 데 평균 12개월이 걸렸다. 해외 유수의 중재 기관들도 14~16개월이 걸리는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재인 수당이 선진국의 60~70% 수준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여전히 평균 중재수수료는 국제무대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다. 분쟁금액 5000만원짜리 중재 사건을 기준으로 중재절차를 진행한다고 가정할 때, 런던(LCIA) 3867만원, 스톡홀름(SCC) 1648만원, 홍콩(HKIAC) 971만원, 싱가포르(SIAC) 900만원 이 소요되지만 서울(KCAB인터내셔널)은 단 62만원을 기록하고 있다. KCAB에선 국제중재사건의 분쟁금액이 2억원 이하이면 아예 중재 신청 비용을 면제해준다.
서울은 일본과 중국, 중동, 아세안 국가들로부터의 접근성이 우수해 급성장하는 아시아 업체들이 이용하기 편리하다. 미국 당사자들도 유럽보다 아시아로 이동하기 편리하다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코로나19 방역, K게임, K팝, K뷰티 등으로 인해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호감도도 상승하고 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이 오사카에 이어 이달 도쿄에 신규 국제중재심리 시설을 열고 맹추격에 나섰다.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도 해외 홍보와 투자에 적극적이다.
KCAB 측은 “시설 업그레이드와 우수 법조인 및 중재인 영입, 국내외 기업에 대한 홍보활동이 시너지를 내면 5~10년 뒤 홍콩 싱가포르 못지않은 아시아의 맹주로 올라설 것”이라며 “정부와 국내 기업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KCAB, 국내 기업의 든든한 후원자
지난 7월 말 국내 한 중소기업은 북유럽 국가로부터 약 50만달러어치를 주문받고 완제품을 보냈지만 상대편 업체에서 코로나19를 이유로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자 곤경에 처했다. 처음 겪어보는 국제 분쟁인 데다 사내 변호사나 법무팀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런 기업들을 위해 중소기업중앙회와 KCAB가 국제중재 변호사 비용의 절반을 지원한다. 두 기관은 올해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과 중소기업협동조합들을 대상으로 법률대리인 선임비용의 최대 50%(총 1500만원)까지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중소기업들로선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상대 국가의 법률로 해외에서 소송을 벌이는 대신 보다 중립적이고 국제적인 표준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중재기관을 통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셈이다.
국내에서 KCAB를 활용할 경우 분쟁금액이 5억원 이하인 사건에 한해 ‘신속절차’로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중재기관의 사무국이 1인 단독중재인을 선정한 뒤 6개월 이내에 결론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KCAB의 지난해 국내 중재사건 평균 처리 기간은 약 6개월(198일)에 그쳤다. 2~3년씩 걸리는 재판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중국 베트남 등 역내 무역 분쟁 주목
KCAB인터내셔널의 ‘2019 연간리포트’에 따르면 KCAB 중재 이용자의 절반은 아시아 기업이다. 단일 국가로는 미국(15.1%)이 가장 많지만 베트남(12.3%), 중국(9.6%), 인도네시아·일본(6.8%) 등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분쟁 분야별로는 무역, 공공·민간 건설, 금융, 해사, 지식재산권, 엔터테인먼트 등이 눈길을 끈다.국제분쟁 4건 중 1건은 대금 불이행이 원인이었다. 이어서 인도지연·불이행, 품질불량, 계약조건 해석의 차이 등이 꼽혔다. 최근에는 분쟁 신청금액이 없는 사건이 다수 증가하는 추세다. 이는 중재절차 진행 중에 금액을 특정하고자 하는 당사자들의 욕구가 커지고 있어서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