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해적이던 그들은 어떻게 다국적 무역상이 됐나[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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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후기 왜구의 변신과 일본의 발전, 조선 공격
후기 왜구, 다국적 상인집단
동남아시아까지 활동범위 넓혀
일본이 변화한 국제환경에 빠르제 적응한 토대
후기 왜구, 다국적 상인집단
동남아시아까지 활동범위 넓혀
일본이 변화한 국제환경에 빠르제 적응한 토대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났고, 82년 지난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피해를 당한 전쟁이 발발했다. 그동안 왜구무리들은 어떻게 활동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강력한 일본군으로 변신했을까. 그리고 조선의 관리와 선비들,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
이 무렵 동아시아 세계에는 ‘후기왜구’들이 발호해 주로 중국 해안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명나라는 1368년에 건국한 후 1371년에는 주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행위를 막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민간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복건성·절강성·광동성 등 해안에 견고한 성들을 쌓고, 군사를 양성했다. 또한 군선들을 건조해 곳곳에 배치했다. 이러한 해금정책은 300년 이상 존속되다가 1684년에야 폐지됐다. ( 모모키 시로, 『해역아시아사 연구입문』)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원나라를 멸망시킬 때 적대적인 관계였던 장사성 등의 해양세력들이 성장하고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였다. 또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와 달리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주의 체제를 복원하고, ‘해양과 무역’이 아닌 ‘내륙과 농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왜구의 발호 때문이었다. 명 정부는 책임을 물어 1386년에는 일본과 외교관계와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1392년에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가 왜구를 진압하자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1404년부터는 조공무역 체제인 ‘감합무역’을 허락했다.
일본은 조공선을 파견해 금·은·구리·유황·철·도검 등을 수출하고, 비단(생사)·동전·도자기 등을 수입해 때로는 5~6배에 달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민간인들은 밀무역할 수밖에 없어 해안가 주민들과 상인들은 해적집단과 연계되거나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일본은 상업과 산업이 발달했고, 무역선들이 동남아시아에까지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523년에 사용을 허가받은 영파항에서 일본의 지방 세력들이 파견한 사절단들이 무역상의 이권을 둘러싸고 큰 싸움을 벌였다. 당연히 명나라는 일본과의 무역을 금했고, 이 ‘영파의 난’을 계기로 후기왜구가 발생했다고 한다.(윤성익, 『명대 왜구의 연구』)
왜구들은 해역의 자연환경과 물류체계에 정통했고, 선박을 능숙하게 운행했다. 일본 무사출신들이 많았고, 조총 등 신형무기들을 사용해 무장력이 매우 뛰어났다. 1547년에는 대규모로 파견된 정부의 진압군도 패배했을 정도였다. 왜구들은 1553년부터는 보통 200척~300척이 모여서 선단을 이뤘다. 대마도, 이키섬, 규슈 북부의 마쓰우라, 오도열도, 히라도, 유구, 대만, 영파, 주산군도, 해남도 등을 근거지로 중국의 해안은 물론이고, 일본과 조선의 연해도 공격했다. 이후 동남아시아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 내부에서는 오히려 해금정책을 완화시켜야 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 척계광은 조선에서 군사훈련에 활용한 병서인 『기효신서』의 필자인데, 1555~1567년까지 왜구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또한 정부는 1567년에는 복건성을 제한적으로 개항해 동남아시아나 포르투갈 등과 무역하는 일을 허락했다. 그 여파로 왜구들의 활동은 다소 주춤했다. 하지만 근절되지 않았으므로 일본과는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후기해적들은 어떻게 구성됐을까?
나라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명사(明史)』 일본전에는 '대체로 진짜 왜는 10분의 3이고, 왜를 따르는 사람은 10분의 7이다'라고 기록됐다. 일부의 왜구와 대다수 중국인들, 지역에 따라서는 약간의 조선인도 있었다. 『세종실록』에는 1446년 조에 나라 백성이 왜구의 옷을 입고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다. 1587년에는 변경의 백성들이 왜구와 내통해 전라도의 손죽도를 공격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데 왜구 집단에는 포르투갈인들과 에스파니아인들도 있었다. 따라서 왜구는 단순한 왜인해적을 넘어 중국인이 주가 된 다국적 상인집단으로 확장변모한 것이다.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에 도착해 후추 등 향신료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1511년 ‘향신료의 섬’인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고,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해협을 거쳐 1512년에는 자바섬에 진출했다. 그런데 1543년 영파로 가던 배가 표류해 규슈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고, 이때 철포(조총)가 일본에 전달됐다. 1549년에는 에스파니아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1553년에 마카오에 진출했고, 1557년에 영유권을 얻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무역망에 참여했다. 복건, 절강 등 동남 연해지역에서 현지 상인들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했으며, 특히 일본의 은을 명나라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
이 무렵 일본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의 상인들과 선원, 선교사들이 들어가 소위 ‘남만(南蠻)문화’가 발달했다. 의술, 천문학, 조선술 등의 신기술을 비롯해 시계, 조총 등의 서양물건들, 그리고 ‘빵’, ‘덴푸라’, ‘카스텔라’ 등 포르투갈에서 흘러들어간 음식문화 등이 유행했다. 천주교가 수용돼 1582년에는 규슈 서부인 오이타(大分)현의 소년 4명이 바다를 건너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로마로 가 교황인 그레고리 13세를 알현했다. 1584년에는 에스파니아인이 규슈 북서부의 히라도에 도착했다. 이처럼 ‘일본의 쇄국’과 ‘조선의 쇄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일본에 굴복당한 조선처럼 된다.
1588년에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를 근절시키는 법령를 발표한다. 결국 왜구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활동과 경험은 일본의 무역발전과 군사대국화의 인적, 물적토대로 변신했다. 일본은 명나라에 다시 은과 우수성이 입증된 일본도 등을 수출했다. 일본은 1560년대 경부터 매년 3만~5만 kg이라는 막대한 은을 중국에 수출했고, 17세기 전반에는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양승윤 최영수 이희수, 『바다의 실크로드』 ). 일부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베트남에 구리와 도자기 등을 수출했고, 베트남 중부의 해안 관광도시인 호이안은 임진왜란 전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했다. 심지어는 총까지 수출했는데, 이 무렵 세계에서 조총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은 변화한 국제환경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재빠르게 변신하면서 적응했다. 반면에 중화주의에 살잡힌 명나라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해금정책을 고집했다. 영락제가 조공 무역권의 부활을 목표로 파견한 정화의 원정대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16년 동안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만의 입구인 호르무즈,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케냐 해안까지 항해했다.
1차 원정대는 길이 150m 정도인 62척의 보(함)선, 2만 7000 명의 선원들을 동원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의 ‘일로(One road)’는 이 사업을 모델과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경제력, 해군력을 갖췄지만 결국 역사발전에서 실패했고, 왜구의 발호는 멸망의 치명적인 요인이 됐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조선의 수준 높은 사대부들과 실권 없는 임금들은 왜구에 어떻게 대응하고, 급변하는 국제환경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당시 조선은 약해지고 있었다. 신세력인 사림과 구세력인 훈구파는 명분으로 포장한 채 권력과 세대교체를 놓고 이전투구 중이었다. 1510년에 삼포왜란, 1519년에 기묘사화, 1544년에 사량진 왜변, 1445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1555년에는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점점 본격적으로 동서 분당이 일어나고, 수준 높은 이기(理氣)논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와 인식이 궁금하다. 의지가 박약하거나 없었던 것일까? 아님 사대국인 명나라의 정책을 부정하지 못했거나 모방한 탓일까? 우리는 수백 년간 수백 번에 걸쳐 왜구들에게 침탈당했고, 일본의 식민지까지 됐다. 일본에 대한 무지와 근거가 희박한 오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비극은 반복될 수도 있다. 그게 역사인 것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왜구의 성격변화와 활동
1419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 전기 왜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본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 주민들과 왜구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강온양면 정책을 썼다. 하지만 왜구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에는 20여 척으로 사량진(부산) 왜변, 1555년에는 70여 척으로 을묘왜변(강진·진도·영암)을 도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가 침략한 기사가 무려 312건이 나온다.이 무렵 동아시아 세계에는 ‘후기왜구’들이 발호해 주로 중국 해안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명나라는 1368년에 건국한 후 1371년에는 주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행위를 막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민간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복건성·절강성·광동성 등 해안에 견고한 성들을 쌓고, 군사를 양성했다. 또한 군선들을 건조해 곳곳에 배치했다. 이러한 해금정책은 300년 이상 존속되다가 1684년에야 폐지됐다. ( 모모키 시로, 『해역아시아사 연구입문』)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원나라를 멸망시킬 때 적대적인 관계였던 장사성 등의 해양세력들이 성장하고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였다. 또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와 달리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주의 체제를 복원하고, ‘해양과 무역’이 아닌 ‘내륙과 농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왜구의 발호 때문이었다. 명 정부는 책임을 물어 1386년에는 일본과 외교관계와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1392년에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가 왜구를 진압하자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1404년부터는 조공무역 체제인 ‘감합무역’을 허락했다.
일본은 조공선을 파견해 금·은·구리·유황·철·도검 등을 수출하고, 비단(생사)·동전·도자기 등을 수입해 때로는 5~6배에 달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민간인들은 밀무역할 수밖에 없어 해안가 주민들과 상인들은 해적집단과 연계되거나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일본은 상업과 산업이 발달했고, 무역선들이 동남아시아에까지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523년에 사용을 허가받은 영파항에서 일본의 지방 세력들이 파견한 사절단들이 무역상의 이권을 둘러싸고 큰 싸움을 벌였다. 당연히 명나라는 일본과의 무역을 금했고, 이 ‘영파의 난’을 계기로 후기왜구가 발생했다고 한다.(윤성익, 『명대 왜구의 연구』)
왜구들은 해역의 자연환경과 물류체계에 정통했고, 선박을 능숙하게 운행했다. 일본 무사출신들이 많았고, 조총 등 신형무기들을 사용해 무장력이 매우 뛰어났다. 1547년에는 대규모로 파견된 정부의 진압군도 패배했을 정도였다. 왜구들은 1553년부터는 보통 200척~300척이 모여서 선단을 이뤘다. 대마도, 이키섬, 규슈 북부의 마쓰우라, 오도열도, 히라도, 유구, 대만, 영파, 주산군도, 해남도 등을 근거지로 중국의 해안은 물론이고, 일본과 조선의 연해도 공격했다. 이후 동남아시아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 내부에서는 오히려 해금정책을 완화시켜야 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 척계광은 조선에서 군사훈련에 활용한 병서인 『기효신서』의 필자인데, 1555~1567년까지 왜구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또한 정부는 1567년에는 복건성을 제한적으로 개항해 동남아시아나 포르투갈 등과 무역하는 일을 허락했다. 그 여파로 왜구들의 활동은 다소 주춤했다. 하지만 근절되지 않았으므로 일본과는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후기해적들은 어떻게 구성됐을까?
나라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명사(明史)』 일본전에는 '대체로 진짜 왜는 10분의 3이고, 왜를 따르는 사람은 10분의 7이다'라고 기록됐다. 일부의 왜구와 대다수 중국인들, 지역에 따라서는 약간의 조선인도 있었다. 『세종실록』에는 1446년 조에 나라 백성이 왜구의 옷을 입고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다. 1587년에는 변경의 백성들이 왜구와 내통해 전라도의 손죽도를 공격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데 왜구 집단에는 포르투갈인들과 에스파니아인들도 있었다. 따라서 왜구는 단순한 왜인해적을 넘어 중국인이 주가 된 다국적 상인집단으로 확장변모한 것이다.
국제환경의 변화
이 무렵은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였고, 서양인들이 인도양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에 도착해 후추 등 향신료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1511년 ‘향신료의 섬’인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고,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해협을 거쳐 1512년에는 자바섬에 진출했다. 그런데 1543년 영파로 가던 배가 표류해 규슈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고, 이때 철포(조총)가 일본에 전달됐다. 1549년에는 에스파니아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1553년에 마카오에 진출했고, 1557년에 영유권을 얻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무역망에 참여했다. 복건, 절강 등 동남 연해지역에서 현지 상인들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했으며, 특히 일본의 은을 명나라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
이 무렵 일본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의 상인들과 선원, 선교사들이 들어가 소위 ‘남만(南蠻)문화’가 발달했다. 의술, 천문학, 조선술 등의 신기술을 비롯해 시계, 조총 등의 서양물건들, 그리고 ‘빵’, ‘덴푸라’, ‘카스텔라’ 등 포르투갈에서 흘러들어간 음식문화 등이 유행했다. 천주교가 수용돼 1582년에는 규슈 서부인 오이타(大分)현의 소년 4명이 바다를 건너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로마로 가 교황인 그레고리 13세를 알현했다. 1584년에는 에스파니아인이 규슈 북서부의 히라도에 도착했다. 이처럼 ‘일본의 쇄국’과 ‘조선의 쇄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일본에 굴복당한 조선처럼 된다.
1588년에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를 근절시키는 법령를 발표한다. 결국 왜구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활동과 경험은 일본의 무역발전과 군사대국화의 인적, 물적토대로 변신했다. 일본은 명나라에 다시 은과 우수성이 입증된 일본도 등을 수출했다. 일본은 1560년대 경부터 매년 3만~5만 kg이라는 막대한 은을 중국에 수출했고, 17세기 전반에는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양승윤 최영수 이희수, 『바다의 실크로드』 ). 일부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베트남에 구리와 도자기 등을 수출했고, 베트남 중부의 해안 관광도시인 호이안은 임진왜란 전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했다. 심지어는 총까지 수출했는데, 이 무렵 세계에서 조총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은 변화한 국제환경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재빠르게 변신하면서 적응했다. 반면에 중화주의에 살잡힌 명나라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해금정책을 고집했다. 영락제가 조공 무역권의 부활을 목표로 파견한 정화의 원정대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16년 동안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만의 입구인 호르무즈,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케냐 해안까지 항해했다.
1차 원정대는 길이 150m 정도인 62척의 보(함)선, 2만 7000 명의 선원들을 동원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의 ‘일로(One road)’는 이 사업을 모델과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경제력, 해군력을 갖췄지만 결국 역사발전에서 실패했고, 왜구의 발호는 멸망의 치명적인 요인이 됐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조선의 수준 높은 사대부들과 실권 없는 임금들은 왜구에 어떻게 대응하고, 급변하는 국제환경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당시 조선은 약해지고 있었다. 신세력인 사림과 구세력인 훈구파는 명분으로 포장한 채 권력과 세대교체를 놓고 이전투구 중이었다. 1510년에 삼포왜란, 1519년에 기묘사화, 1544년에 사량진 왜변, 1445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1555년에는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점점 본격적으로 동서 분당이 일어나고, 수준 높은 이기(理氣)논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와 인식이 궁금하다. 의지가 박약하거나 없었던 것일까? 아님 사대국인 명나라의 정책을 부정하지 못했거나 모방한 탓일까? 우리는 수백 년간 수백 번에 걸쳐 왜구들에게 침탈당했고, 일본의 식민지까지 됐다. 일본에 대한 무지와 근거가 희박한 오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비극은 반복될 수도 있다. 그게 역사인 것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