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가 이건희, 그의 전략적 직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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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이미 이뤄졌고, 이뤄질 예정이다. 오래전 삼성을 출입하면서 이건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략가 이건희였다. 제3세계의 이름 없는 기업을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전략가 이건희의 가장 큰 무기는 전략적 직관과 생각의 힘이었다. 고독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오래전 쓴 책에 기초해 내용을 몇가지로 정리해봤다.
삼성전자가 생긴 지 5년밖에 안된 해였다. TV도 일본에서 부품을 사다 조립해 팔 때 였다. 반도체가 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이병철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건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회사가 안하면 개인 돈으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건희가 사재로 인수해 시작한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삼성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다.
#2 1987년 세계반도체 업계는 고민에 부딪쳤다. 반도체 설계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두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쟁점은 데이터가 들어갈 공간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하나는 파고 들어가는 트렌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얇은 층을 여러겹 쌓는 스택방식이다. 방식을 잘못 선택하면 생산성이 떨어져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갈림길에서 삼성전자는 스택방식을 택했다. 이건희는 “쌓는 것이 파고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단순한 논리로 밀어붙였다.
얼마 후 스택방식을 선택한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다른 회사들을 앞도하기 시작했다.
#3 1993년 어느날 삼성그룹 수뇌부들이 태평로 빌딩 한 회의실에 모였다. 이건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이건희는 양과 질을 놓고 사장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건희는 “양은 포기하고 질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서실 직원들은 부정적 의견을 내놨다. 제품을 국내 시장에만 내다 놓으면 무조건 팔리던 때였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황에서 양을 포기한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이건희가 최후통첩을 했다. “그동안 양이 7이고 질이 3이었다면, 앞으로는 질이 10이고 양은 0입니다.” 비서실장이었던 이수빈이 반발했다. 이건희는 티스푼을 던져버리고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다음날 이수빈을 경질해버렸다. 이건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질 경영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건희가 삼성전자를 경영하면서 내린 중요한 결정들이다. 이런 결정은 대부분 적중했다. 이건희는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건희 생각의 궤적을 추적해 봤다.
그 첫 번째 키워드는 직관이다.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에 대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는 것이다. 오일쇼크로 인한 충격 때문에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때 반도체란 단어가 그를 끌어당겼다. 말 그대로 하면 ‘감’이었다.
당시 그에게는 반도체 산업에 진출해 연구개발을 어떻게 하고, 세계시장에서 강자들과 어떻게 경쟁할 지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계획이 없었다는 것은 경영학적 분석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그의 생각을 지배했다는 얘기다.
그는 시대의 과제와 자신의 직감을 결합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반도체 사업을 하지 않으면 미래에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패배자의 길을 벗어나기 위한 모험을 택했다.
이런 결정을 설명하는 용어가 직관이다. ‘감’이란 단어를 성공한 사업가들에게 적용할 때는 ‘직관’으로 바꿔 부른다. 이건희 스스로도 “나는 선친으로부터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직관을 중시했다.
그가 한국기업이 반도체 산업에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직관이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한민족이 젓가락을 쓰는 문화권에 있기 때문에 손재주가 좋고, 주거생활을 할때 신발을 벗고 생활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점을 반도체 성공가능성의 근거로 들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왠지 딱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이 결정이 직관에 따른 감각적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이건희는 중요한 결정 대부분을 이런 방식으로 했다. 이건희가 내린 결정은 숫자로 성공가능성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파격적 결정의 연속이었으며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애널리스트들은 이런 이건희 중심의 삼성식 의사결정 방식이 불투명하다며 투덜거렸다. 삼성의 가장 큰 위험 요인중 하나가 “이건희를 중심으로 한 불투명한 경영방식”이라고 지적하는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도 많았다. 그들은 숫자를 원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세상을 바꾼 전략적 판단 대부분은 이런 순서로 이뤄진다는 것이 경영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방대한 연구와 검토가 이뤄진 후 무언가 끌어당기는 듯한, 또는 갑자기 찾아오는 듯한 감에 의해 전략적 판단이 이뤄진다. 그 판단은 실행으로 이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 성과로 증명된다. 치밀한 시장 조사를 거쳐 숫자로 성공가능성을 판단한 후 실행한다는 일반적 생각과는 정반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숫자로 증멸할 수 없고, 어떤 경영학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모험에 가까운 결정. ‘이건희의 직관’이었다.
컬럼비아 대학 교수인 윌리엄 더건은 ‘위대한 전략가의 조건’이란 책에서 “다양한 경험에서 오는 단순한 전술적 직관과 달리 전략적 직관은 경험과 냉철한 판단, 역사에 대한 학습, 그리고 실행력으로 뒷받침된다”고 했다. 이건희의 감은 완벽히 전략적 직관에 속한다.
이건희도 직관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경영자에 대해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이 이건희 경영철학의 요체이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전략적 직관의 힘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10년후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라”고 외치며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
이런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중시했던 대표적 경영자는 스티브 잡스였다. 스티브 잡스는 1983년 매킨토시를 출시하고 한 기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매킨토시에 대한 수요조사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잡스는 답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할 때 수요를 조사하고 발명했습니까?”
이건희가 제시하는 방법의 핵심 단어는 “생각”이다. ‘생각의 힘’을 빌어 내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수 있고, 좀더 깊이 들어가면 미래도 볼 수 있다는 게 이건희의 지론이다.
‘생각에 관한 이건희의 생각’을 알 수 있는 표현이 있다. ‘정신적 몸살’이다. 그는 1993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물리적인 고통은 잘 견뎌왔으나 정신적인 고통은 잘 못 참는다. 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골치 아프다는 말은 이런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앞으로는 육체적 몸살을 앓는 것에서 벗어나 정신적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정신적 몸살. 신체를 많이 쓰면 몸살에 걸리듯, 뇌를 많이 쓰면 정신적 몸살에 걸린다고 이건희는 생각했다. 고도로 집중해 생각하다보면 “뇌를 쉬게 해줘야 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가 되어야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건희에게 생각은 직관과 통찰력을 길러주는 유력한 방법이었으며, 전략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이건희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방법도 제시했다. “골치 아픈것(정신적 훈련)도 훈련하면 된다. 2km를 뛰다가 3km, 4km를 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안 뛰다가 갑자기 4km를 뛰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도저히 생각을 더하지 못할 정도가 될 때 그 고비를 넘기고 답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정신적 몸살이 찾아온다. 이때 뇌의 용량이 확대되고, 생각의 힘은 길러진다.
실제 이건희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이면 철저히 혼자가 됐다. 혼자 어디론가 틀어박혀 뇌가 몸살에 걸릴 정도 생각했다.
생각이 더 이상 갈곳이 없는 깊은 곳에 다다르면 사고는 단순해진다. 그리고 해법은 머릿속에 명쾌하게 정리된다. 이건희는 사고를 단순화했다. 실패할 때의 손실과, 시도도 하지 않았을때 맞닥뜨릴 결과를 비교했다. 그는 “기회상실로 인한 손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2002년 이건희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 제목은 “이보게 생각 좀 하며 살게”였다. 가벼운 표현이었다. 하지만 생각중독자 이건희가 자서전에 달만한 제목이었다.
이건희가 이처럼 생각중독자가 된 이유가 있다. 고독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게 버릇이 됐다. 그래서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먹으니 혼자 있게 됐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독이 그에게 준 선물은 생각의 힘이었고, 생각은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던 직관과 통찰력을 그에게 가져다 줬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그중 하나가 전략가 이건희였다. 제3세계의 이름 없는 기업을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전략가 이건희의 가장 큰 무기는 전략적 직관과 생각의 힘이었다. 고독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오래전 쓴 책에 기초해 내용을 몇가지로 정리해봤다.
1.전략적 직관
#1 1974년 삼성전자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회장 이병철의 셋째 아들 이건희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자”고 제안한 것이 발단이었다.삼성전자가 생긴 지 5년밖에 안된 해였다. TV도 일본에서 부품을 사다 조립해 팔 때 였다. 반도체가 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이병철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건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회사가 안하면 개인 돈으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건희가 사재로 인수해 시작한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삼성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다.
#2 1987년 세계반도체 업계는 고민에 부딪쳤다. 반도체 설계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두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쟁점은 데이터가 들어갈 공간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하나는 파고 들어가는 트렌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얇은 층을 여러겹 쌓는 스택방식이다. 방식을 잘못 선택하면 생산성이 떨어져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갈림길에서 삼성전자는 스택방식을 택했다. 이건희는 “쌓는 것이 파고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단순한 논리로 밀어붙였다.
얼마 후 스택방식을 선택한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다른 회사들을 앞도하기 시작했다.
#3 1993년 어느날 삼성그룹 수뇌부들이 태평로 빌딩 한 회의실에 모였다. 이건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이건희는 양과 질을 놓고 사장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건희는 “양은 포기하고 질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서실 직원들은 부정적 의견을 내놨다. 제품을 국내 시장에만 내다 놓으면 무조건 팔리던 때였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황에서 양을 포기한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이건희가 최후통첩을 했다. “그동안 양이 7이고 질이 3이었다면, 앞으로는 질이 10이고 양은 0입니다.” 비서실장이었던 이수빈이 반발했다. 이건희는 티스푼을 던져버리고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다음날 이수빈을 경질해버렸다. 이건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질 경영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건희가 삼성전자를 경영하면서 내린 중요한 결정들이다. 이런 결정은 대부분 적중했다. 이건희는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건희 생각의 궤적을 추적해 봤다.
그 첫 번째 키워드는 직관이다.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에 대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는 것이다. 오일쇼크로 인한 충격 때문에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때 반도체란 단어가 그를 끌어당겼다. 말 그대로 하면 ‘감’이었다.
당시 그에게는 반도체 산업에 진출해 연구개발을 어떻게 하고, 세계시장에서 강자들과 어떻게 경쟁할 지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계획이 없었다는 것은 경영학적 분석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그의 생각을 지배했다는 얘기다.
그는 시대의 과제와 자신의 직감을 결합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반도체 사업을 하지 않으면 미래에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패배자의 길을 벗어나기 위한 모험을 택했다.
이런 결정을 설명하는 용어가 직관이다. ‘감’이란 단어를 성공한 사업가들에게 적용할 때는 ‘직관’으로 바꿔 부른다. 이건희 스스로도 “나는 선친으로부터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직관을 중시했다.
그가 한국기업이 반도체 산업에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직관이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한민족이 젓가락을 쓰는 문화권에 있기 때문에 손재주가 좋고, 주거생활을 할때 신발을 벗고 생활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점을 반도체 성공가능성의 근거로 들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왠지 딱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이 결정이 직관에 따른 감각적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이건희는 중요한 결정 대부분을 이런 방식으로 했다. 이건희가 내린 결정은 숫자로 성공가능성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파격적 결정의 연속이었으며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애널리스트들은 이런 이건희 중심의 삼성식 의사결정 방식이 불투명하다며 투덜거렸다. 삼성의 가장 큰 위험 요인중 하나가 “이건희를 중심으로 한 불투명한 경영방식”이라고 지적하는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도 많았다. 그들은 숫자를 원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세상을 바꾼 전략적 판단 대부분은 이런 순서로 이뤄진다는 것이 경영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방대한 연구와 검토가 이뤄진 후 무언가 끌어당기는 듯한, 또는 갑자기 찾아오는 듯한 감에 의해 전략적 판단이 이뤄진다. 그 판단은 실행으로 이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 성과로 증명된다. 치밀한 시장 조사를 거쳐 숫자로 성공가능성을 판단한 후 실행한다는 일반적 생각과는 정반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숫자로 증멸할 수 없고, 어떤 경영학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모험에 가까운 결정. ‘이건희의 직관’이었다.
컬럼비아 대학 교수인 윌리엄 더건은 ‘위대한 전략가의 조건’이란 책에서 “다양한 경험에서 오는 단순한 전술적 직관과 달리 전략적 직관은 경험과 냉철한 판단, 역사에 대한 학습, 그리고 실행력으로 뒷받침된다”고 했다. 이건희의 감은 완벽히 전략적 직관에 속한다.
이건희도 직관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경영자에 대해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이 이건희 경영철학의 요체이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전략적 직관의 힘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10년후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라”고 외치며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
이런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중시했던 대표적 경영자는 스티브 잡스였다. 스티브 잡스는 1983년 매킨토시를 출시하고 한 기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매킨토시에 대한 수요조사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잡스는 답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할 때 수요를 조사하고 발명했습니까?”
2. "뇌가 몸살에 걸릴때까지 생각하라"
이런 직관은 타고 나는 것일까. 이건희는 “직관과 통찰력은 훈련을 통해 기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체득한 방법도 상세히 제시했다.이건희가 제시하는 방법의 핵심 단어는 “생각”이다. ‘생각의 힘’을 빌어 내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수 있고, 좀더 깊이 들어가면 미래도 볼 수 있다는 게 이건희의 지론이다.
‘생각에 관한 이건희의 생각’을 알 수 있는 표현이 있다. ‘정신적 몸살’이다. 그는 1993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물리적인 고통은 잘 견뎌왔으나 정신적인 고통은 잘 못 참는다. 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골치 아프다는 말은 이런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앞으로는 육체적 몸살을 앓는 것에서 벗어나 정신적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정신적 몸살. 신체를 많이 쓰면 몸살에 걸리듯, 뇌를 많이 쓰면 정신적 몸살에 걸린다고 이건희는 생각했다. 고도로 집중해 생각하다보면 “뇌를 쉬게 해줘야 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가 되어야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건희에게 생각은 직관과 통찰력을 길러주는 유력한 방법이었으며, 전략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이건희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방법도 제시했다. “골치 아픈것(정신적 훈련)도 훈련하면 된다. 2km를 뛰다가 3km, 4km를 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안 뛰다가 갑자기 4km를 뛰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도저히 생각을 더하지 못할 정도가 될 때 그 고비를 넘기고 답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정신적 몸살이 찾아온다. 이때 뇌의 용량이 확대되고, 생각의 힘은 길러진다.
실제 이건희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이면 철저히 혼자가 됐다. 혼자 어디론가 틀어박혀 뇌가 몸살에 걸릴 정도 생각했다.
생각이 더 이상 갈곳이 없는 깊은 곳에 다다르면 사고는 단순해진다. 그리고 해법은 머릿속에 명쾌하게 정리된다. 이건희는 사고를 단순화했다. 실패할 때의 손실과, 시도도 하지 않았을때 맞닥뜨릴 결과를 비교했다. 그는 “기회상실로 인한 손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3. 생각중독자, 고독이 준 선물
이건희는 늘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다. 생각은 그에게 직관과 솔루션을 제공했다. 그가 수많은 성공적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힘이었다. 전남대 강준만 교수는 이런 이건희를 “생각 중독자”라고 표현했다.2002년 이건희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 제목은 “이보게 생각 좀 하며 살게”였다. 가벼운 표현이었다. 하지만 생각중독자 이건희가 자서전에 달만한 제목이었다.
이건희가 이처럼 생각중독자가 된 이유가 있다. 고독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게 버릇이 됐다. 그래서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먹으니 혼자 있게 됐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독이 그에게 준 선물은 생각의 힘이었고, 생각은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던 직관과 통찰력을 그에게 가져다 줬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