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때 '즐거운 편지'로 등단
반전 담은 극서정시로 '명성'
詩의 집, 짓고 부수길 64년
詩는 삶을 압축한 언어의 문학
'늙음을 넘어서는 생' 깨달아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올해로 시작(詩作) 인생 64년을 맞이한 황동규 시인(82)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지성사)를 최근 출간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열아홉살 나이에 대표 시 ‘즐거운 편지’를 쓴 이래 시의 집을 짓고 부수길 반복한 지 60여 년. 망구(望九)를 갓 넘긴 지금 황 시인이 새롭게 깨달은 화두는 ‘늙음을 넘어서는 생의 의지’였다.
지난달 30일 서울 사당동 한 카페에서 만난 황 시인은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2016년 《연옥의 봄》 이후 4년 만에 새로 묶어낸 이번 시집에 대해 그는 “마지막 시집이 될 수도 있다”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4~5년 시를 더 쓴다 해도 이젠 유고시집에 들어갈 확률이 더 높겠죠. 하지만 내 삶의 마지막을 미리 알 수 없듯 내 시의 운명에 대해서도 아직은 말을 삼가야겠죠.”
황 시인은 대표적인 극서정시인(劇敍情詩人)이다. 극서정시에선 연극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 시의 처음과 끝의 정황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황 시인은 “서울대 영어영문학 교수 시절 수많은 영미시와 영미 희곡을 가르치며 극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며 “시라고 끝까지 똑같이 흘러가는 게 싫었고 극 속 반전이 시에 들어간다면 희망이나 기쁨을 얘기하는 데 적합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총 4부로 나뉜 이번 시집 역시 늙음에 대한 회한을 넘어 삶의 열정과 의지를 담아낸 78편의 극서정시를 담았다. 대부분 주어진 조건을 이겨내보자는 게 화두다. 화자인 황 시인은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음에도 시 안에서 쇼팽의 마주르카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라벨의 ‘볼레로’ 음악에 맞춰 계단도 오른다.
특히 첫 장에 나오는 ‘불 빛 한 점’은 극서정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창 때 그대의 시는/그대의 앞길 밝혀주던 횃불이었어’라고 말한 뒤 이내 ‘60년이 바람처럼 지난 뒤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이 되었군’이라며 지난 세월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말미에 이르러선 ‘어둠보다 낫다고 선장이 켜놓고 내린 불빛들이 하나하나 켜지고…반갑다’라며 미소짓는다. 황 시인이 지난 시 인생을 돌아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불 빛 한 점’은 이 시집의 전반적인 색채를 부여한 시죠. 늙음에 지고 싶지 않지만 만나는 건 할 수 없잖아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겠다는 시는 시집에 하나도 없습니다. 늙음이라는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의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시란 무엇일까. “시는 우리 삶을 가장 압축된 언어로 만든 문학이기에 어떤 문학보다도 언어의 깊이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시에 생명력이 생기죠. 그러려면 자기 삶을 담아야 합니다. 그렇게 시를 쓰면 시인이 죽어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죠. 죽은 다음에도 삶이 있는 것입니다. 저 자연처럼요.”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