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지노믹스는 질환 유발 단백질의 3 차원 구조를 규명해 해당 단백질이 활성화되는 부위에 결합할 수 있는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하는 바이오 기업이다. 2003년 발기부전을 일으키는 단백질인 ‘PDE-5’의 활동을 비아그라가 저해하는 기전을 3차원 분자 구조 모형으로 밝히며, 국내 산·학·연 최초로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표지논문을 게재하는 성과를 냈다. 2015년 국산 신약 22호인 골관절염 치료제 아셀렉스를 시장에 내놓으며 신약 상업화 성과도 입증했다.
파이프라인들의 임상도 한창이다. 분자 단위에서 특정 질환 유발 단백질을 표적으로 하는 췌장암 치료 후보물질인 아이발티노스타트(CG-745)는 국내 임상 3상, 미국 임상 2 상 진입을 앞두고 있다.
질환 유발하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 밝혀 신약 개발
크리스탈지노믹스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뜻하는 ‘크리스탈’과 유전체학을 가리키는 ‘지노믹스’를 합친 이름이다.우리 몸속 유전자는 환경에 따라 발현 양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방사선과 같은 발암물질에 노출되면 환경에 따라 효소의 일종인 히스톤디아세틸레이즈(HDAC)가 DNA나 DNA를 둘러싸고 있는 히스톤 단백질에 달라붙는다.
이렇게 되면 DNA의 특정 유전자가 과발현되거나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더라도 환경에 따라서 암, 알츠하이머성 치매 등 발병 여부가 달라지는 건 대부분이 HDAC와 같은 후성유전체의 변화 때문이다. 후성유전체는 유전자의 발현 정도를 후천적으로 조절하는 물질이다.
후성유전체 단백질은 활성화되지 않았을 땐 아미노산이 일렬로 쭉 붙어 있는 선형 구조를 이루지만 활성화되면 복잡한 3차원 구조를 형성한다. 이 3차원 구조를 밝힌 뒤 질환 유발 단백질의 활성 부위에 결합할 수 있는 물질을 원자 단위에서 설계해 만드는 게 크리스탈지노믹스의 플랫폼 기술이다.
질환을 일으키는 단백질들의 3차원 구조를 밝히기 위해선 우선 해당 단백질을 만들어야 한다. 실험실에서 대장균이나 포유동물 세포를 통해 만들어낸 질환 유발 단백질을 99.9%의 고순도로 정제해 결정 형태로 만들어야 3차원 구조 규명이 가능하다. 이 결정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가 ‘크리스탈’이다.
조중명 크리스탈지노믹스 회장은 “크리스탈은 나노미터 단위로 형성돼 직접 관찰이 불가능하다”며 “포항공대에 있는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해 방사선을 쏜 뒤 산란하는 중성자빔을 관측해 크리스탈의 컴퓨터 그래픽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그래픽을 활용해 우리 몸속 질환 유발 단백질의 3차원 구조도 규명하게 된다”며 “질환 유발 단백질의 활성 부위에 달라붙을 수 있는 초기물질을 약 4800만 개 확보했다”고 말했다.
췌장암 생존 기간 6.2→12.9개월로 늘려
크리스탈지노믹스가 개발 중인 핵심 파이프라인은 췌장암 치료제인 ‘CG-745’다. 췌장암은 환자의 90%가 말기(4기)에서 진단되는 암이다. 전이가 이뤄져 수술이 불가능한 경우엔 5년 생존율이 3% 미만에 불과하다. CG-745는 후성유전체의 일종인 HDAC 효소를 표적으로 한다.HDAC 효소는 세포 내 신호 전달에 관여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 HDAC 효소가 지나치게 많이 발현되면 암이 생길 수 있다.
조 회장은 “HDAC는 크게 네 종류가 있는데 CG-745는 이 가운데 두 종류의 발현을 조절한다”며 “말기 췌장암 환자에게 투약한 결과 평균 생존기간이 기존 치료제 대비 6.2개월에서 12.9개월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CG-745는 기존 췌장암 치료제인 젬시타빈, 얼로티닙과 병용하는 내용으로 국내 임상 2 상을 진행해 지난 3월 마쳤다. 지난달 식품의 약품안전처에 신속심사 신청도 했다.
조 회장은 “분자 단위로 표적이 가능한 치료제 특성상 세포 독성 부작용도 기존 치료제보다 적게 나왔다”며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 미국 임상 2상과 한국 임상 3상의 시험계획 (IND)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임상 2 상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오면 글로벌 제약사에 라이선스 아웃도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CG-745는 간암을 대상으론 PD-1 면역관문억제제와 병용 투여하는 방식으로 임상을 추진 중이다. 당초 이 회사는 미국 바이오 기업 아폴로믹스의 PD-1 면역관문억제제인 APL-501과 병용 투여를 하려 했으나 전략을 수정해 이미 시판 중인 키트루다, 옵디보 등 다른 PD-1 면역관문억제제제와의 병용 투여를 고려하고 있다.
혈액암 치료제, 슈퍼박테리아 항생제 개발도 순항
또 다른 분자표적 항암제도 있다. CG-806 은 혈액암의 원인이 되는 질환 유발 단백질인 FLT3과 BTK 모두 저해할 수 있는 신약 후보물질이다. 아직까지 두 물질을 동시에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혈액암 치료제는 나오지 않았다. BTK를 저해하는 기존 치료제로는 애브비의 임브루비카가 있다.조 회장은 “임브루비카와 비교했을 때 CG-806이 BTK 돌연변이에 대해서 더 뛰어난 효과를 나타냈다”며 “이중 저해제로 만들어져 내성 균주가 생길 빈도도 더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탈지노믹스는 오는 12 월 미국에서 열리는 혈액암학회에서 CG-806의 미국 임상 1상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슈퍼박테리아를 박멸하기 위한 항생제도 개발 중이다. CG-549는 슈퍼박테리아에 있는 FabI 효소의 작용을 막는다. FabI 효소는 슈퍼박테리아의 세포막 단백질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단백질이다. 이 효소의 작용을 막아 세포막이 형성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슈퍼박테리아를 파괴해 항생 효과를 낸다. 지난 7월 네덜란드에서 임상 1상을 마쳤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