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톨스토이, 67세에 자전거 배우며 '부활'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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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주기…그의 창작 이면
어린 아들 잃은 슬픔 '운동 치유'
68~70세에는 테니스·스케이트
매일 아령·체조…'젊은 정신' 단련
쾌락과 죄악, 이상과 현실 사이
사랑·구원 위해 스스로 채찍질
고두현 논설위원
어린 아들 잃은 슬픔 '운동 치유'
68~70세에는 테니스·스케이트
매일 아령·체조…'젊은 정신' 단련
쾌락과 죄악, 이상과 현실 사이
사랑·구원 위해 스스로 채찍질
고두현 논설위원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67세 때 일곱 살짜리 아들을 잃었다. 환갑이 다 돼 얻은 금쪽같은 막둥이다. 실의에 빠진 그는 식음을 전폐했고, 한 달 뒤에야 몸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면서 그는 슬픔을 딛고 홀로 서는 법을 익혔다.
모스크바 남쪽 200여㎞의 야스나야 폴랴나 저택에 그가 조립한 자전거가 보관돼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다. 그에게 자전거는 뒤뚱거리는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균형과 조화의 상징물이었다. 그는 나이가 더 든 뒤에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심신을 단련했다. 그 덕분에 말년의 역작 《부활》을 꼼꼼히 구상하고 완성할 수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의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종교적 모순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한 힘도 거기에서 나왔다.
68세 때에는 테니스를 배웠다. 집 한쪽에 코트를 만들고 매주 테니스를 치면서 그는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향해 공을 날렸다. 당시 찍은 흑백사진에 라켓을 들고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노년의 그가 서 있다. 네트 건너편에 있는 드레스 차림의 여성들은 딸이다.
그는 70세에 스케이트를 타며 얼음을 지쳤다. 80세 넘어서까지 아령 체조로 몸과 마음을 가꿨다. 생애 마지막 해인 82세 때에도 말을 타고 25㎞를 달렸다. 그는 말년 일기에 ‘매일 체조를 하며 체력을 기른다. 오늘 아침에 택한 운동은 팔굽혀펴기다. 숨이 차고 관절이 우두둑거릴 때까지 팔굽혀펴기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을 혹독하리만치 연단하면서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끝없이 고뇌했다. 당시만 해도 자전거와 테니스는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는 저녁마다 ‘저 밖에는 힘들게 사는 농부가 너무나 많은데 이렇게 즐겨도 괜찮은 걸까’라며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나아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도덕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거듭했다. 그는 오랜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을 ‘네 개의 마차 팀(four horse-teams)’에 비유했다. “최선의 방법은 인간의 네 가지 능력을 훈련하며 이를 일상에서 번갈아 가며 하는 것이다. 하루의 한 부분은 힘든 육체노동을 위한 것이고, 또 한 부분은 생각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수공예, 네 번째는 소통이다.”
그는 백작 신분이었지만 아침 일찍 서재와 공작실을 청소하고, 장작을 가져와 불을 피우며, 물을 길어오는 데에 첫 번째 마차를 사용했다. 나머지 마차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며, 구두와 장갑을 직접 만들고, 농민을 위한 학교를 세우면서 그의 이웃들이 선한 삶을 살도록 돕는 데 활용했다.
그는 이런 것들이 곧 자기 삶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아내와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늘 삐걱거렸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10년 11월, 그는 아내와 크게 다투고 집을 나갔다. 싸움의 원인은 저작권 문제였다. 그는 저작권을 포함한 재산을 모두 기부하려고 했지만, 가정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아내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을 나온 지 열흘 만에 그는 폐렴에 걸려 허름한 간이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향집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에 묻힌 그의 묘지에는 유언대로 비석도, 묘비도 없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불리는 그도 이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하늘로 갔다.
오는 20일 110주기를 맞는 그는 《부활》의 한 장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인간을 두고서 당신은 성인이라든가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선 당신은 악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항상 인간은 그런 식으로 구분 짓고 있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때로 삶의 길을 잃고 헤매며 쾌락과 죄악 사이에서 갈등하고, 기우뚱거리는 자전거 위에서 생을 바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는 인류의 구원과 참된 사랑의 의미를 생애 마지막까지 탐구하려고 애쓴 작가였다. 그의 깊은 고뇌와 성찰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은빛 바퀴처럼 우리 곁으로 굴러오고 있다.
부푼 꿈을 안고 아침 일찍 출발한 그는 계속 걷고 걸었다. 갈수록 더 기름진 땅이 눈앞에 펼쳐져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가 서산마루를 막 넘어가려는 순간 출발선으로 아슬아슬하게 돌아왔다.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몸을 지나치게 혹사한 그는 심장이 터져 죽고 말았다.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3아르신(러시아의 단위, 가로·세로 약 2.2m) 넓이의 무덤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땅에 대한 욕심의 끝은 허망하다. 권력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kdh@hankyung.com
모스크바 남쪽 200여㎞의 야스나야 폴랴나 저택에 그가 조립한 자전거가 보관돼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다. 그에게 자전거는 뒤뚱거리는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균형과 조화의 상징물이었다. 그는 나이가 더 든 뒤에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심신을 단련했다. 그 덕분에 말년의 역작 《부활》을 꼼꼼히 구상하고 완성할 수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의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종교적 모순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한 힘도 거기에서 나왔다.
68세 때에는 테니스를 배웠다. 집 한쪽에 코트를 만들고 매주 테니스를 치면서 그는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향해 공을 날렸다. 당시 찍은 흑백사진에 라켓을 들고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노년의 그가 서 있다. 네트 건너편에 있는 드레스 차림의 여성들은 딸이다.
그는 70세에 스케이트를 타며 얼음을 지쳤다. 80세 넘어서까지 아령 체조로 몸과 마음을 가꿨다. 생애 마지막 해인 82세 때에도 말을 타고 25㎞를 달렸다. 그는 말년 일기에 ‘매일 체조를 하며 체력을 기른다. 오늘 아침에 택한 운동은 팔굽혀펴기다. 숨이 차고 관절이 우두둑거릴 때까지 팔굽혀펴기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을 혹독하리만치 연단하면서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끝없이 고뇌했다. 당시만 해도 자전거와 테니스는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는 저녁마다 ‘저 밖에는 힘들게 사는 농부가 너무나 많은데 이렇게 즐겨도 괜찮은 걸까’라며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나아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도덕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거듭했다. 그는 오랜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을 ‘네 개의 마차 팀(four horse-teams)’에 비유했다. “최선의 방법은 인간의 네 가지 능력을 훈련하며 이를 일상에서 번갈아 가며 하는 것이다. 하루의 한 부분은 힘든 육체노동을 위한 것이고, 또 한 부분은 생각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수공예, 네 번째는 소통이다.”
그는 백작 신분이었지만 아침 일찍 서재와 공작실을 청소하고, 장작을 가져와 불을 피우며, 물을 길어오는 데에 첫 번째 마차를 사용했다. 나머지 마차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며, 구두와 장갑을 직접 만들고, 농민을 위한 학교를 세우면서 그의 이웃들이 선한 삶을 살도록 돕는 데 활용했다.
그는 이런 것들이 곧 자기 삶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아내와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늘 삐걱거렸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10년 11월, 그는 아내와 크게 다투고 집을 나갔다. 싸움의 원인은 저작권 문제였다. 그는 저작권을 포함한 재산을 모두 기부하려고 했지만, 가정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아내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을 나온 지 열흘 만에 그는 폐렴에 걸려 허름한 간이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향집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에 묻힌 그의 묘지에는 유언대로 비석도, 묘비도 없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불리는 그도 이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하늘로 갔다.
오는 20일 110주기를 맞는 그는 《부활》의 한 장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인간을 두고서 당신은 성인이라든가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선 당신은 악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항상 인간은 그런 식으로 구분 짓고 있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때로 삶의 길을 잃고 헤매며 쾌락과 죄악 사이에서 갈등하고, 기우뚱거리는 자전거 위에서 생을 바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는 인류의 구원과 참된 사랑의 의미를 생애 마지막까지 탐구하려고 애쓴 작가였다. 그의 깊은 고뇌와 성찰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은빛 바퀴처럼 우리 곁으로 굴러오고 있다.
사람에게는 땅과 권력이 얼마나 필요한가
톨스토이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은 시골 농부다. 그의 꿈은 자신의 땅을 풍족하게 갖는 것이다. 어느 날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특별한 조건을 이행하면 아주 싼값에 땅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돈 1000루블만 내면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걸어서 돌아온 땅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조건에 합의했다.부푼 꿈을 안고 아침 일찍 출발한 그는 계속 걷고 걸었다. 갈수록 더 기름진 땅이 눈앞에 펼쳐져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가 서산마루를 막 넘어가려는 순간 출발선으로 아슬아슬하게 돌아왔다.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몸을 지나치게 혹사한 그는 심장이 터져 죽고 말았다.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3아르신(러시아의 단위, 가로·세로 약 2.2m) 넓이의 무덤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땅에 대한 욕심의 끝은 허망하다. 권력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