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나 마르치 EMI·DG선집…수수하지만 우아하며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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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의 명반 순례
드라마 ‘싸인’의 한 장면은 10년이 돼가도 잊을 수 없다. 부검을 조작해준 국과수 원장(전광렬)이 그 대가로 받은 선물이 요한나 마르치의 바흐 초반 엘피다.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듣는 표정엔 흡족함이 가득하다. 클래식 음반계에서 마르치의 이름은 ‘고귀함’으로 통한다.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는 1924년 현재는 루마니아땅인 티메스바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 일곱 살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예뇌 후바이에게 인정받아 제자가 된다. 열 살 때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했고 열세 살 때 공개 연주회를 열어 호평받았다. 1947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한 이후 음반과 무대에서 활약했고 1979년 외지에서 쓸쓸히 객사했다. 54세의 아까운 나이. 최후 10년 동안은 음반도 녹음하지 않았다.
195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마르치의 연주가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듣는 이를 사로잡는 것일까. 들어보면 연주가 나긋나긋하고 유연하다. 고전주의적인 양식미 위에 따스한 감성이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소박하고 수수하되 우아해서 싫증이 나지 않는다. 풀 먹인 하얀 셔츠에 검정 치마를 입고 시골 초등학교에 부임하는 여자선생님 같은 청신한 인상을 주기에 언제나 그녀의 연주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다.
마르치의 녹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규 레코딩은 EMI와 DG에서 나와 있다. 이들을 열세 장 CD로 묶은 음반 박스는 마르치 진수를 알려주는 최고의 선집이다.
음반들 중에서도 바흐와 슈베르트가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드라마에도 나왔던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에서 마르치의 정확한 음정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스위스의 완만한 하이킹 코스를 걷는 듯한 쾌적함으로 다가온다.
슈베르트의 소나티네와 판타지는 지금도 마르치의 해석을 따를 연주가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마리 학이 안갯속 비경 속에서 깃털을 고르는 듯한 고고함, 밝고 자애로운 세계에서 어둑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슈베르트의 환상성을 잘 구현했다.
베토벤 소나타 8번과 모차르트 K376은 특유의 새침함이 느껴져서 자주 듣게 된다. 드보르자크 협주곡은 일찍이 인터내셔널반으로 소개됐다. 마르치가 공유하는 동구권의 감수성이 구구절절하게 펼쳐진다. 연주의 양감이 촉촉하고 알알이 뚜렷한 브람스 협주곡과 말쑥한 모차르트 협주곡 3번과 4번, 두 종류의 멘델스존 협주곡은 언제 들어도 그리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녹음 기술은 발전하고 연주 기술은 진화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오늘도 녹음을 쏟아낸다. 그런 21세기에도 마르치의 연주에 여전히 손이 간다. 첫사랑 소녀가 살던 동네를 거니는 기분이다. 즐겁고 아름다웠던, 가끔은 울컥하게 만드는 추억이 소담스럽게 살아 있는 곳으로 시간여행할 수 있다.
류태형 < 음악 칼럼니스트 >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는 1924년 현재는 루마니아땅인 티메스바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 일곱 살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예뇌 후바이에게 인정받아 제자가 된다. 열 살 때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했고 열세 살 때 공개 연주회를 열어 호평받았다. 1947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한 이후 음반과 무대에서 활약했고 1979년 외지에서 쓸쓸히 객사했다. 54세의 아까운 나이. 최후 10년 동안은 음반도 녹음하지 않았다.
195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마르치의 연주가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듣는 이를 사로잡는 것일까. 들어보면 연주가 나긋나긋하고 유연하다. 고전주의적인 양식미 위에 따스한 감성이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소박하고 수수하되 우아해서 싫증이 나지 않는다. 풀 먹인 하얀 셔츠에 검정 치마를 입고 시골 초등학교에 부임하는 여자선생님 같은 청신한 인상을 주기에 언제나 그녀의 연주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다.
마르치의 녹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규 레코딩은 EMI와 DG에서 나와 있다. 이들을 열세 장 CD로 묶은 음반 박스는 마르치 진수를 알려주는 최고의 선집이다.
음반들 중에서도 바흐와 슈베르트가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드라마에도 나왔던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에서 마르치의 정확한 음정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스위스의 완만한 하이킹 코스를 걷는 듯한 쾌적함으로 다가온다.
슈베르트의 소나티네와 판타지는 지금도 마르치의 해석을 따를 연주가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마리 학이 안갯속 비경 속에서 깃털을 고르는 듯한 고고함, 밝고 자애로운 세계에서 어둑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슈베르트의 환상성을 잘 구현했다.
베토벤 소나타 8번과 모차르트 K376은 특유의 새침함이 느껴져서 자주 듣게 된다. 드보르자크 협주곡은 일찍이 인터내셔널반으로 소개됐다. 마르치가 공유하는 동구권의 감수성이 구구절절하게 펼쳐진다. 연주의 양감이 촉촉하고 알알이 뚜렷한 브람스 협주곡과 말쑥한 모차르트 협주곡 3번과 4번, 두 종류의 멘델스존 협주곡은 언제 들어도 그리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녹음 기술은 발전하고 연주 기술은 진화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오늘도 녹음을 쏟아낸다. 그런 21세기에도 마르치의 연주에 여전히 손이 간다. 첫사랑 소녀가 살던 동네를 거니는 기분이다. 즐겁고 아름다웠던, 가끔은 울컥하게 만드는 추억이 소담스럽게 살아 있는 곳으로 시간여행할 수 있다.
류태형 < 음악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