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선 가상자산 서비스 열풍…"VVIP 고객들이 원한다"
美페이팔은 가상자산 구매·판매·결제 서비스 개시
피델리티·JP모건·DBS 등 글로벌 금융사들도 가세
“가상자산(암호화폐)은 도박보다 극심한 사기다. 아예 폐지하자!”얼마전 가상자산 관련 기사에 실제로 남겨진 댓글입니다.
“그런데 (페이팔은) 가상자산을 왜 쓰는 거죠? 도대체 왜?”
약 3억5000만명에 달하는 이용자를 보유한 세계 최대 온라인 결제 기업 페이팔은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가상자산 거래 및 결제 서비스를 개시했습니다. 피델리티, JP모건 등 내로라 하는 글로벌 금융 기업들도 잇따라 가상자산을 활용한 서비스를 출시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국내 여론은 좀처럼 '가상자산은 도박이자 사기'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오히려 위 댓글처럼 글로벌 금융 기업들이 왜 가상자산 서비스에 뛰어 들고 있는 것인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의견이 다수 존재합니다.
도대체 왜 글로벌 금융 기업들은 가상자산 서비스를 앞다투어 내놓고있는 걸까요. 정말 일부 의견처럼 이들도 돈 앞에 무리한 '베팅'을 한 것일까요.
페이팔 CEO "가상자산, 기존 금융 서비스 대비 이점 있다"
페이팔은 지난 12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오늘부터 직접 가상자산을 구매, 보유, 판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페이팔 내에서 비트코인, 이더리움, 비트코인캐시, 라이트코인 등의 가상자산을 사고 팔거나 전세계 2600만 페이팔 가맹점에서 결제용도로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전문가들은 페이팔의 이 같은 시도가 비자, 마스터카드 등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가상자산을 활용하면 비자, 마스터카드 등의 결제망을 이용할 때보다 송금 수수료가 훨씬 적게 들면서도 더욱 빠르게 대금 지불·결제가 가능합니다.
또 일각에서는 이를 통해 아직 금융 서비스가 활성화되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금융 시장 선점을 노려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터넷만 있다면 별도의 은행계좌나 금융 정보가 없더라도 가상자산을 활용해 결제, 송금 등의 서비스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존 금융 기관이 아직 개척하지 못한 개발도상국 등의 금융시장을 가상자산 서비스를 활용해 조기 선점하겠다는 복안이죠.
댄 슐먼 페이팔 최고경영자(CEO)는 "통화가 디지털 형태로 전환되는 것은 불가피한 대세"라면서 "금융 서비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제, 지불 시스템의 효율성과 속도, 유연성 등의 면에서 가상자산이 기존 자산 거래에 대비해 분명한 장점을 제공한다"고 강조했습니다.
"VVIP 고객들이 원한다"…앞다퉈 가상자산 서비스 내놓는 은행들
미국계 글로벌 투자은행인 JP모건은 지난 5월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와 제미니에 은행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자산운용사인 피델리티는 지난해 뉴욕 금융감독청(NYDFS)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기관투자자들에게 비트코인 커스터디(수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죠.아예 자체적으로 가상자산 거래소까지 준비하고 있는 은행도 나왔습니다.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이 소유한 동남아시아 최대 은행인 싱가포르개발은행(DBS)은 지난달 가상자산 거래소 'DBS 디지털 익스체인지'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글로벌 금융기업들이 잇따라 가상자산 서비스를 내놓고 있는 이유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기관투자자들과 자산가 등 VVIP(최우선 고객)들을 중심으로 가상자산 투자·결제 수요가 급증한 것이 원인"이라고 짚었습니다.
단순히 미래에 더 많이 쓰일 것이라고 예상해서 성급하게 서비스를 내놓은 게 아니라 실제로 대형 투자자들이 가상자산 서비스를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퀀트 펀드의 대가' 짐 사이먼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 회장은 지난 3월부터 비트코인 투자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달 포브스가 발표한 사이먼스 회장의 개인 자산은 235억달러(약 26조원)에 달합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에서 가장 유명한 퀀트 투자 펀드인 '메달리온 펀드'는 시카고 상품거래소(CME) 내 상장된 비트코인 선물에 투자 할 것임을 올해 초 공식 보고서를 통해 밝혔습니다.
이외에도 '전설적인 헤지펀드 매니저'인 스탠리 드러켄밀러, 폴 튜더 존슨, 빌 밀러 등이 비트코인 투자를 공식화 했으며 수많은 억만장자들이 대규모의 가상자산 투자를 단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개인 자산만 최소 수 백억원에서 수 십 조원에 이르는 은행의 'VVIP'들 입니다.
또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자산 투자사인 '그레이스케일'에는 지난 2분기에만 9억달러(약 1조 700억원)이 넘는 투자금이 몰렸습니다. 그레이스케일은 2분기에 몰린 투자액 중 84%가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자들의 자금이라고 밝혔습니다.
대형 투자자들이 가상자산을 보유하고 가상자산 관련 서비스를 원하자 은행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수 백억원에서 수십조원의 재산을 굴리는 자산가들과 기관투자자들의 자금이 가상자산 서비스 제공 여부에 따라 이탈할 수도, 유입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국내 은행들도 암암리에 '가상자산 서비스 전쟁'
국내 은행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각국 은행들이 이미 가상자산 수탁서비스 등에 뛰어들며 글로벌 고객들을 확보하고 관련 경쟁력을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예컨대 미국 은행들은 지난 7월 통화감독청(OCC)이 가상자산 수탁 서비스를 허용함에 따라 이미 합법적으로 가상자산 수탁 사업을 진행하며 다국적 기업들의 가상자산 투자 자금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반면 국내 은행들은 여전히 가상자산 관련 사업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2017년 금융기관의 가상자산 보유, 거래 및 지분투자 등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고, 현재도 이같은 조치가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같은 상황에서도 국내 은행들은 암암리에 가상자산 서비스 개발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안 그래도 약한 글로벌 금융시장 내 국내 금융 기업들의 입지를 통째로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생긴 겁니다.
정부가 언제 이 같은 규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미래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준비하겠다는 것이죠. 현재 국민은행, 신한은행, 농협, 하나은행 등이 가상자산 관련 수탁 서비스를 검토 또는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진석 KB국민은행 IT혁신센터장은 "미국에서는 연기금 또는 하버드, 스탠포드, MIT, 예일대 소유 펀드들이 가상자산 펀드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이상 (우리도) 시장을 거스를 순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현기 신한은행 디지털전략본부장은 "과거에는 프라이빗(폐쇄형) 블록체인 관점에서만 개발을 진행했지만 지금은 가상자산 등 퍼블릭 블록체인(비트코인 등)을 쓸 기회가 생기는 것 같다. 비즈니스 확대를 노리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기사는 11월 15일(01:27) 블록체인·가상자산 투자 정보 플랫폼(앱) '블루밍비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김산하 한경닷컴 기자 san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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