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희망, 통합, 품위, 진실의 과학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의 승리로 끝났다. 개표 초반 의외로 도널드 트럼프가 앞섰지만 바이든의 막판 뒤집기는 보는 재미(?)를 더해줬다. 트럼프의 패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는데,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부실 대응이 그중 하나다. 감염병 전문가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희화화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과학의 대상이었지만, 트럼프는 철저히 정치적 계산에 의해 인간 의지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미국은 코로나19 확진자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바이든의 승리 선언 연설 현장에는 ‘우리는 희망, 통합, 품위, 과학 그리고 진실을 선택했다’는 구호가 전광판에 띄워졌다. 희망, 통합, 품위, 진실, 이 네 가지는 모두가 추구하는 이상임이 틀림없었고, 과학이 이 이상들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과학적 사실과 합리성이야말로 이 네 가지 이상을 이루는 신뢰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이든은 최고의 과학자와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을 구성해 취임 즉시 시행될 코로나19 대응 계획을 마련하리라 밝히며, 이를 과학의 견고한 기초 위에 세울 것이라고 천명했다.

트럼프의 과학 불신은 부동산 재벌로서의 신념이었는지 모르겠다. 철저히 지지층에만 관심을 기울인 그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조차 부정하며 표심에 도움이 될 것만 선택적으로 정책에 반영했다. 에너지 과소비를 제한하는 파리기후협정 탈퇴가 대표적 예인데, 자유로운 에너지 소비를 원하는 지지층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그가 보여준 비과학적 대응책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오죽하면 사이언스지가 지난 10월호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기간이 ‘과학과 증거의 묵살’로 점철됐다고 표현했을까. 당연하지만 지난 4년간 예산이 지속적으로 삭감돼온 분야 역시 기초과학과 환경이다.

불신의 시대를 경험한 미국 과학계는 바이든의 당선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일단 신정부가 출범하면 과학기술정책 기조가 많이 바뀌리라 생각한다. 기초과학, 특히 생명과학과 청정에너지 분야는 투자 1순위일 것이다. 친환경주의자인 바이든은 지구온난화와 환경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한편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첨단 제조업과 혁신기업 지원,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등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 대한 투자도 계속될 것이다. 동시에 ICT 기업 규제는 강화되리라는 일각의 우려도 있다. 하지만 기초과학 진흥과 산업 경쟁력 확보는 이제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기초과학으로 일군 지식이 신산업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바이든 정부가 어떻게 만들어낼지 우리도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미국 중심주의’ 완화로 과학기술 분야 국제교류 활성화가 기대되는 만큼 더욱 적극적인 과학 외교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