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괴물이 되지 않으려는 안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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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증오의 거짓말들에 떠밀려
자신의 양심을 파괴하지 말고
자유를 지키기 위한 용기를 내야"
이응준 < 시인·소설가 >
자신의 양심을 파괴하지 말고
자유를 지키기 위한 용기를 내야"
이응준 < 시인·소설가 >
10년 전 한 영화제작자가 췌장암으로 숨을 거뒀다. 이른 나이에 독신이었다. 그 상가에서 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사내 옆에서 술을 마셨다. 고인과 우리 셋은 친구였다. 남은 인생, 세상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살다가 죽겠노라 다짐하는 그를 나는 물끄러미 보았다. 벗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조지 오웰은 청년 시절 영국 식민지 버마(‘미얀마’의 전 이름)에서 경찰로 근무했다. 국제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이 대영제국주의의 공권력임을 부끄러워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순사로 지내면서 일본제국주의를 미워하는 일본인 공산주의자인 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어느 날, 경찰 오웰은 길들여진 코끼리가 발정이 나 난동을 부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마을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고 남자도 하나 죽어 있었다. 하지만 저만치서 풀을 뜯고 있는 코끼리는 이미 진정상태로 접어들어 염소만큼도 위험해 보이질 않았다. 코끼리는 큰 재산인 데다가 짐승의 생태를 관리 못 한 책임은 코끼리의 주인에게 있기에 오웰은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동물에게 도덕과 형법을 들이댈 순 없는 노릇이며 무엇보다, ‘야생 코끼리’를 ‘인간의 코끼리’라고 우기고 있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라 인간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새 몰려든 2000명이 넘는 군중은 ‘괴이한 희열’에 눈이 돌아가 있었다. 코끼리가 날뛸 적에는 제 안위만 챙기던 사람들이 살기가 등등해 한껏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은 제 소유도 아닌 코끼리 고기까지 탐냈다. 순간 오웰은 깨닫는다. 저 군중 때문에 코끼리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을. 그게 지배자인 영국인 경찰과 피지배자인 버마인들 사이의 문제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악마의 원리’라는 것을. ‘사람들의 어두운 기대’에 떠밀려 자신의 양심과 자유가 파괴되리라는 것을. 결국 오웰은 살인하는 심정보다 더 큰 괴로움 속에서 여러 발의 난사 끝에 코끼리를 죽인다.
“사람들은 사악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들은 단검과 바구니를 든 채, 쓰러져 피 흘리는 코끼리에게 아귀 떼처럼 달려들어 순식간에 뼈만 남겨버린다. 과연 저들 가운데 내가 오로지 바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코끼리를 죽였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단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조지 오웰은 《코끼리를 쏘다》라는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버마의 영국인 청년 경찰 에릭 아서 블레어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아파할 줄 아는 영혼이었기에 좌익 파시즘, 우익 파시즘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파시즘들을 경고하고 고발한 작가 조지 오웰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거짓말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라고 말했으며 “정치적 글을 예술로까지 승화시키고 싶다”는 꿈이 있던 그는 그 꿈을 이루고 마흔일곱 살에 죽었다.
눈을 감으면 각자 살아오면서 죽였던 코끼리들이 보일 것이다. 나도 수많은 코끼리들을 쏴 죽였다. 나의 무지가 날 그렇게 만든 군중이기도 했고 내 욕망이 그러한 군중이기도 했으며 때로 그 군중은 실제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기도 했다. 다만 폭로하고 싶은 것은 정의로운 자유인으로 변장한 채 중독된 진영증오 속에서 미쳐버린 자들의 거짓말이다.
‘인간’에 대한 의심을 놓지 말아야 우리는 겨우 파시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사상은 기질이 입은 옷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살다가 죽는다. 그날 밤 남은 인생 자유인으로 살겠다던 그 친구는 3년 뒤 교통사고로 죽었다. 나는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얼마나 지켰는지 모른다. 인생은 스스로에게조차 수수께끼니까. 다만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조지 오웰처럼, 우리 모두는 군중 때문에 코끼리를 총 쏘아 죽이는 괴물은 되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믿는 일과도 같다.
조지 오웰은 청년 시절 영국 식민지 버마(‘미얀마’의 전 이름)에서 경찰로 근무했다. 국제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이 대영제국주의의 공권력임을 부끄러워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순사로 지내면서 일본제국주의를 미워하는 일본인 공산주의자인 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어느 날, 경찰 오웰은 길들여진 코끼리가 발정이 나 난동을 부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마을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고 남자도 하나 죽어 있었다. 하지만 저만치서 풀을 뜯고 있는 코끼리는 이미 진정상태로 접어들어 염소만큼도 위험해 보이질 않았다. 코끼리는 큰 재산인 데다가 짐승의 생태를 관리 못 한 책임은 코끼리의 주인에게 있기에 오웰은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동물에게 도덕과 형법을 들이댈 순 없는 노릇이며 무엇보다, ‘야생 코끼리’를 ‘인간의 코끼리’라고 우기고 있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라 인간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새 몰려든 2000명이 넘는 군중은 ‘괴이한 희열’에 눈이 돌아가 있었다. 코끼리가 날뛸 적에는 제 안위만 챙기던 사람들이 살기가 등등해 한껏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은 제 소유도 아닌 코끼리 고기까지 탐냈다. 순간 오웰은 깨닫는다. 저 군중 때문에 코끼리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을. 그게 지배자인 영국인 경찰과 피지배자인 버마인들 사이의 문제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악마의 원리’라는 것을. ‘사람들의 어두운 기대’에 떠밀려 자신의 양심과 자유가 파괴되리라는 것을. 결국 오웰은 살인하는 심정보다 더 큰 괴로움 속에서 여러 발의 난사 끝에 코끼리를 죽인다.
“사람들은 사악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들은 단검과 바구니를 든 채, 쓰러져 피 흘리는 코끼리에게 아귀 떼처럼 달려들어 순식간에 뼈만 남겨버린다. 과연 저들 가운데 내가 오로지 바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코끼리를 죽였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단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조지 오웰은 《코끼리를 쏘다》라는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버마의 영국인 청년 경찰 에릭 아서 블레어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아파할 줄 아는 영혼이었기에 좌익 파시즘, 우익 파시즘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파시즘들을 경고하고 고발한 작가 조지 오웰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거짓말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라고 말했으며 “정치적 글을 예술로까지 승화시키고 싶다”는 꿈이 있던 그는 그 꿈을 이루고 마흔일곱 살에 죽었다.
눈을 감으면 각자 살아오면서 죽였던 코끼리들이 보일 것이다. 나도 수많은 코끼리들을 쏴 죽였다. 나의 무지가 날 그렇게 만든 군중이기도 했고 내 욕망이 그러한 군중이기도 했으며 때로 그 군중은 실제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기도 했다. 다만 폭로하고 싶은 것은 정의로운 자유인으로 변장한 채 중독된 진영증오 속에서 미쳐버린 자들의 거짓말이다.
‘인간’에 대한 의심을 놓지 말아야 우리는 겨우 파시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사상은 기질이 입은 옷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살다가 죽는다. 그날 밤 남은 인생 자유인으로 살겠다던 그 친구는 3년 뒤 교통사고로 죽었다. 나는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얼마나 지켰는지 모른다. 인생은 스스로에게조차 수수께끼니까. 다만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조지 오웰처럼, 우리 모두는 군중 때문에 코끼리를 총 쏘아 죽이는 괴물은 되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믿는 일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