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계약 후진국' 민낯…하청업체 23%, 계약서 못 받았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중요한 거래를 할 때 계약서를 작성하는 건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집을 사고 팔면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쓰고, 집을 임대하거나 전월세를 살면 부동산 임대차계약서를 써야 한다. 자동차를 사고 팔 때는 자동차 매매계약서를 쓴다. 금전 거래를 하면 차용증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근로계약서를 반드시 써야 한다. 이를 어기면 법적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유독 수백억원 규모의 기업 간 거래에서는 이 같은 상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제조·용역·건설업 하도급 기업 네 곳 중 한 곳은 거래를 하면서 계약서를 받지 못하고 구두 계약만 맺었다. 한국의 하도급 기업 중 계약서를 받지 못한 기업의 비율(서면 미교부 비율)은 1982년 계약서 작성이 법적으로 의무화된 이후 한 번도 2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후진적인 계약 문화는 한국보다 소득 수준이 낮은 대부분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계약서를 쓰기는 하지만 원청업체가 일방적으로 하도급업체에 불리한 조항을 넣는 사례도 20%가 넘었다. 공정위가 원청업체 5000여 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 비율은 2015년 75.6%에서 지난해 72.2%로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표준하도급계약서는 공정위가 업종별로 제시하는 '가이드 라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표준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 중 대부분은 하청업체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담긴 불공정계약서를 쓴 경우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하도급 '갑질'의 대부분은 계약서를 제대로 쓰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게 공정위 설명이다. 공정위가 발표한 하도급 관련 제재 사례 중 대부분은 서면 미교부가 포함돼 있다. 하도급 계약은 작업을 먼저 의뢰한 뒤 완료 후 대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이뤄지는데, 원청 기업이 계약서가 없다는 점을 빌미로 대금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비용 없는 추가 작업을 요구하는 식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경기가 좋을 때는 구두 계약만으로도 정상적으로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에 하청 기업 입장에서도 굳이 원청의 비위를 거스르면서 계약서를 요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하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서면 미교부는 집중 감시를 받는 대기업보다는 중견·중소기업,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해외 기업과 거래해야 하는 수출기업보다는 내수기업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유독 서면 미교부 사례가 많은 이유로 '유교 문화'를 꼽는다. 공정위 출신 공정거래 전문가인 최재원 변호사는 "오랜 세월 동안 유교 질서 하에서 지배를 받아온 동양문화의 특징이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한다. 서양에서는 원청 기업과 하청 기업이 동등한 계약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지만, 동양에서는 일을 주는 원청이 이를 받는 하청에 군림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공정위도 서면 미교부 비율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로 문화적 요인을 지목하고 있다. 2018년 서면 미교부에 부과하는 과태료 상한을 5억원에서 10억원으로 늘렸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회 전반에 계약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도 서구 선진국들처럼 하도급계약을 일반적인 민사 계약처럼 사적 자치에 맡기는 게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본다"며 "원청과 하청, 주주와 경영자 등 전반적인 계약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잡는다면 하도급법이나 기업집단 관련 규제를 지금보다 완화해도 불공정행위 우려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런데 유독 수백억원 규모의 기업 간 거래에서는 이 같은 상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제조·용역·건설업 하도급 기업 네 곳 중 한 곳은 거래를 하면서 계약서를 받지 못하고 구두 계약만 맺었다. 한국의 하도급 기업 중 계약서를 받지 못한 기업의 비율(서면 미교부 비율)은 1982년 계약서 작성이 법적으로 의무화된 이후 한 번도 2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후진적인 계약 문화는 한국보다 소득 수준이 낮은 대부분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도급 기업 23.3%, "계약서 못 받았다"
한국경제신문이 23일 공정위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제조・용역・건설업종 기업 9만4600여곳 중 하도급 업무를 하면서 계약서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23.3%(2만2000여곳)에 달했다. 이전 4년간 이 비율은 △2015년 47.0% △2016년 38.1% △2017년 34.9% △2018년 43.6% 등 연 평균 40% 안팎으로 집계됐다. 공정위 관계자는 "지난해 비율이 확 낮아지긴 했지만 특별한 계기가 없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통계적 착시'라고 본다"며 "여전히 계약서를 쓰지 않는 거래가 상당수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계약서를 쓰기는 하지만 원청업체가 일방적으로 하도급업체에 불리한 조항을 넣는 사례도 20%가 넘었다. 공정위가 원청업체 5000여 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 비율은 2015년 75.6%에서 지난해 72.2%로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표준하도급계약서는 공정위가 업종별로 제시하는 '가이드 라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표준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 중 대부분은 하청업체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담긴 불공정계약서를 쓴 경우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하도급 '갑질'의 대부분은 계약서를 제대로 쓰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게 공정위 설명이다. 공정위가 발표한 하도급 관련 제재 사례 중 대부분은 서면 미교부가 포함돼 있다. 하도급 계약은 작업을 먼저 의뢰한 뒤 완료 후 대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이뤄지는데, 원청 기업이 계약서가 없다는 점을 빌미로 대금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비용 없는 추가 작업을 요구하는 식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경기가 좋을 때는 구두 계약만으로도 정상적으로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에 하청 기업 입장에서도 굳이 원청의 비위를 거스르면서 계약서를 요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하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서면 미교부는 집중 감시를 받는 대기업보다는 중견·중소기업,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해외 기업과 거래해야 하는 수출기업보다는 내수기업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덧붙였다.
"계약문화 자리잡아야 공정위 규제도 완화 가능"
기업 간 거래에서 이렇게 계약서를 잘 쓰지 않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계약 문화가 발달한 서구 선진국들에서는 일부 의도적인 범죄를 제외하면 계약서를 쓰지 않는 사례가 전무한 수준이다. 그나마 선진국 중 서면 미교부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하는 나라는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다.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유독 서면 미교부 사례가 많은 이유로 '유교 문화'를 꼽는다. 공정위 출신 공정거래 전문가인 최재원 변호사는 "오랜 세월 동안 유교 질서 하에서 지배를 받아온 동양문화의 특징이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한다. 서양에서는 원청 기업과 하청 기업이 동등한 계약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지만, 동양에서는 일을 주는 원청이 이를 받는 하청에 군림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공정위도 서면 미교부 비율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로 문화적 요인을 지목하고 있다. 2018년 서면 미교부에 부과하는 과태료 상한을 5억원에서 10억원으로 늘렸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회 전반에 계약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도 서구 선진국들처럼 하도급계약을 일반적인 민사 계약처럼 사적 자치에 맡기는 게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본다"며 "원청과 하청, 주주와 경영자 등 전반적인 계약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잡는다면 하도급법이나 기업집단 관련 규제를 지금보다 완화해도 불공정행위 우려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