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라. 지금 일본 혼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자위대 제군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제군은 사무라이(무사·武士)다.

너희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

일본 근본이 왜곡돼 있다.

나는 자위대가 일어나는 날을 기다렸다.

제군 가운데 나를 따를 사람은 없는가?"
1970년 11월 25일 오전 11시, 극우단체 다테노카이(楯の會·방패회) 회장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회원 4명과 함께 일본 도쿄(東京)의 육상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를 찾아 우수 대원을 포상하겠다며 총감 면담을 요청했다.

총감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미시마 일행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일본도를 꺼내 들고 마쓰다(松田) 총감을 인질로 삼은 뒤 자위대원들을 집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자위대원 1천여 명이 연병장에 모였다.

'칠생보국'(七生報國·일곱 번 태어나도 조국에 보답하겠다는 뜻)이라고 적힌 띠를 머리에 두른 미시마는 본관 2층 발코니에서 자위대원들을 내려다보며 일장연설을 폈다.

전쟁 포기와 국가 교전권 불인정 등을 규정한 이른바 평화헌법을 개정하도록 자위대가 나서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건물 밖에서는 TV가 이 광경을 생중계했다.

그러나 미시마에게 돌아온 것은 자위대원들의 냉소와 야유뿐이었다.

낙담한 미시마는 "이제 자위대에 품은 내 꿈은 사라졌다"면서 "천황 폐하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윗도리를 벗고 자신의 배에 단도를 찔러넣었다.

곁에 서 있던 방패회 회원이 고통을 줄여주려고 군도로 미시마의 목을 내리쳤다가 실패한 뒤 자신도 할복했다.

또 다른 회원이 이들의 목을 날리고 나머지 회원 두 명과 함께 순순히 체포됐다.

이를 지켜본 일본 국민은 경악했다.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사람도 있었지만, 충격적인 장면에 놀라고 이 일이 가져올 파장을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각국의 반응을 의식해 언짢은 태도를 보이면서도 평소 자신을 찬양했다는 말을 듣고 장례 비용을 보냈다.

미시마의 본명은 히라오카 기미타케(平岡公威)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고위 관료를 지낸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귀족학교 가쿠슈인(學習院) 중고교와 명문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조부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3대 고등문관시험 합격이란 기록을 세우고 1948년 대장성(지금의 재무성) 은행국에 들어갔다가 문학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못해 8개월 만에 그만뒀다.

1968년 '설국'(雪國)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뒤 1949년 장편소설 '가면의 고백'을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동성애자가 겪는 고통을 묘사한 자전적 이야기여서 파문이 일어났다.

이후 전후 세대의 허무주의와 이상 심리를 탐미적 스타일로 표현한 '사랑의 갈증'(1950), '금지된 색'(1954), '파도 소리'(1954) 등으로 일본 문단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했다.

그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은 '금각사'(1954)였다.

한 사미승이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다가 좌절해 국보인 금각사를 불태우기까지의 심리 흐름을 치밀하게 그렸다.

1936년 '2·26 사건'을 모티브로 한 1960년 작 '우국'(憂國)은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로 변한 그의 내면을 잘 드러낸다.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반역자로 몰린 천황파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명령에 따라 총살된 것을 통탄하며 한 일본군 중위가 할복자살하자 부인도 따라 자살한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다.

그 뒤로도 '영령(英靈)의 소리'(1966) 등으로 천황제 파시즘을 향한 낭만적 동경을 표현하던 미시마는 1968년 천황의 방패가 되자는 뜻으로 '다테노카이'를 결성했다.

명실상부한 천황제 부활, 반공, 폭력 불사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미시마가 직접 면접해 명문대 재학생과 졸업생 중에서 회원을 엄선했고, 의무적으로 한 달간 자위대 병영 체험을 하게 했다.

다테노카이 회원들은 1968년 일본과 유럽을 휩쓴 학생운동·노동운동 시위대를 미행하거나 이들 단체에 잠입한 뒤 정보를 수집하고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1969년 5월 13일 미시마는 도쿄대의 좌파 학생운동단체 전공투(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 농성장에 혼자 들어가 학생 1천여 명과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미시마 유키오 자살 사건 50주년을 앞두고 미시마의 유작 '풍요의 바다' 시리즈가 국내에 선보이고 있다.

귀족 후계자, 우익 청년, 태국 공주, 사악한 고아로 환생을 거듭하는 한 영혼과 그를 관찰하는 초월적 인물을 통해 메이지(明治) 시대 말기부터 1975년까지 근현대 일본의 모습을 보여준다.

민음사는 지난 9월 1부 '봄눈'을 시작으로 2부 '달리는 말', 3부 '새벽의 사원', 4부 '천인오쇠'까지 전권을 차례로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미시마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장장 5년에 걸쳐 원고지 6천 장 분량에 담았다.

4부 '천인오쇠' 원고를 11월 25일 출판사에 넘기고 자위대 총감부를 찾아갔다.

그는 당시 자위대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세간의 평도 "시대착오적 망동"이라거나 "우익적 개죽음" 등이 주조를 이뤘다.

그러나 일본 우익은 그를 정신적 지주로 만들려고 꾸준히 시도해왔다.

적어도 1990년까지 20년간은 이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의 거품 경제가 꺼지고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면서 우경화 움직임이 본격화한 가운데 미시마 탄생 80주년을 맞은 2005년에는 재평가·재조명 작업이 활발했다.

2012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집권 이후에는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정부도 평화헌법 개정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지난 9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신임 총리가 취임한 뒤로도 이러한 기조는 바뀌지 않고 있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12월 한국에 부임한 도미타 고지(富田浩司) 일본대사는 미시마의 사위이기도 하다.

문학 작품과 개인의 행동은 구별돼야 한다.

혈연이나 친인척 여부를 놓고 대사 자격의 적절성을 따지는 것은 외교적 결례 이전에 금지돼야 할 연좌제다.

한국과 일본은 사이좋게 지내야 할 가까운 이웃이고 협력이 절실한 동반자다.

그러나 최근 상황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미시마의 충격적인 죽음을 상기하며 이후 일본 정치와 사회의 궤적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