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석의 데스크 칼럼] 내로남불의 작동 메커니즘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의 실험 하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수학 문제 20개를 풀도록 했다. “땡!” 시험 시간이 끝나고, 답안지를 배포했다. “스스로 채점해 보고 결과를 말해주세요.” 평균 6문제 정도 맞혔다고 답했다. 시험지를 수거한 뒤 다시 채점했다. 정답 개수는 대략 4개. 실험을 반복해도 결론은 비슷했다. 참가자들은 매번 거짓말을 했고, 그 차이는 늘 한두 문제 정도로 미미했다.

또 다른 실험. 대학 기숙사 냉장고에 콜라와 현금을 넣어뒀다. 학생들은 콜라에만 손을 댔다. 애리얼리는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 사람은 대규모 부정을 저지르진 않는다. 자그마한 부정행위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한다.” 왜 그럴까? “스스로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게 애리얼리의 해석이다.

오도된 신념이 내로남불 잉태

인간은 허술하다. 적당히 속이고, 적당히 죄책감과 타협한다. 지나치게 자신을 닦달하면 ‘멘탈’이 견디지 못한다.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심리적 고육책이다. 반면 타인의 잘못엔 민감하다. 자신의 이익이 침해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못 본다’는 말은 이런 인간의 속성을 지적한 은유다. 요즘 말로 치환하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속세의 풍경은 늘 이랬다. 그래도 큰 탈 없이 굴러왔다. 거짓말의 사이즈가 소소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짓말하는 인간의 본성이 ‘증폭’되는 경우다.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나라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증폭의 재료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잘못된 신념이다.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신념이 강할수록 자신에게 허용하는 심리적 면죄부는 두꺼워진다. 보상심리도 한몫한다. “내가 얼마나 희생하며 살아왔는데….”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사고회로가 오작동을 일으킨다. 주변의 질책은 탄압으로, 온당한 비난은 오해로 해석된다.

생생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요즘 들어 발발 빈도가 유독 잦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온갖 이슈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발언을 쏟아낸다. 동일한 검찰총장에 대해 상황에 따라 180도 다른 평가를 내리고, 사모펀드와 부동산 등에도 나와 남을 갈라 상이한 잣대를 들이대기 일쑤다.

합리적 의심으로 확산 막아야

내로남불은 금융권에도 출몰했다. 금융감독원은 각종 사모펀드에서 사고가 속출하자 은행과 증권사 최고경영자(CEO)에게 줄줄이 중징계를 내렸고, 내릴 예정이다. 반면 금융시장 감독 부실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느냐는 시중의 비판은 흘려버린다. 국가 부채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시각도 돌변했다. 6년 전엔 “부채 주도 성장은 다음 정부에 폭탄을 떠넘기는 무모한 정책”이라고 했다가 집권 후엔 “국가부채비율 마지노선이 40%라는 근거가 뭐냐”고 되물었다.

내로남불 시리즈는 이밖에도 줄줄이 사탕이다. 등장인물 수도 과장하면 거의 삼국지 수준이다.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고 진보 논객(강준만 전북대 교수)이 한탄할 정도다.

한국판 내로남불은 코로나19만큼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코로나19는 ‘3밀(밀폐·밀접·밀집) 환경’을 토대로, 내로남불은 ‘맹목적 지지세력’을 동력으로 빠르게 번져 나간다. 바이러스의 창궐을 막으려면 백신이 필요하다. 내로남불의 백신은 ‘합리적 의심’이다. 오염된 팩트와의 ‘거리두기’다. 덮어놓고 추종하다간 ‘공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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