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를 갚는 대신 상표권을 넘겼다면,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그 이후에는 그 상표권을 써서는 안 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제1부(주심 박정화 김선수 대법관)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B씨가 또다른 출판업자 A씨에 대해 제기한 등록무효 소송을 원고 승소 취지로 특허법원에 돌려보냈다고 26일 밝혔다.

A씨는 1974년부터 '청문각출판사'라는 상호로 교재를 펴낸 출판업자다. 그는 교육서적 전문 출판사인 교문사의 대표 B씨에게 5억원의 차용금 채무를 부담하고 있었다.

A씨는 2012년 이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청문각출판사의 재고 및 출판권 등을 양도하기로 협의했다. 이에 B씨는 교문사 사업장 소재지와 같은 주소로 청문각이라는 상호의 사업자등록을 마쳤다.

B씨는 이후 청문각 상호로 이 출판사가 팔던 책을 출판, 판매했다. 원래의 청문각출판사에서 일하던 직원들 중 절반 가량을 교문사에 채용해 해당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또 기존 청문각이 보유하던 출판권에 관해 출판권자들과 새롭게 출판권설정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A씨는 2013년 2월께 인터넷에 '도서출판 청문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직원채용공고를 게시하는 등 청문각 상호를 사용했다. 2015에는 청문각 출판사 고유의 등록서비스표를 출원해 등록을 받기도 했다. 이에 B씨는 해당 등록상표가 무효라며 등록을 허용한 특허심판원의 심결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냈다.

특허법원은 특허권 양도계약이 영업양도계약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B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선사용서비스표가 피고 B씨 외의 타인이 사용하거나 사용을 준비 중인 서비스표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구 상표법 제7조 제1항 제18호를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구 상표법 제7조 제1항 제18호에 따르면, 동업·고용 등 계약관계나 업무상 거래관계 등 관계를 통해 타인이 사용하거나 사용 준비 중인 상표임을 알면서 그 상표와 동일·유사한 상품을 등록출원한 상표에 대해서는 상표 등록을 받을 수 없게 돼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신의성실의 원칙'이 구 상표법을 앞선다고 판단하고 B씨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 재판부는 "A씨는 이 사건 양도계약 등을 통해 '청문각'이라는 표장의 사용권을 B에게 이전한 뒤, B가 표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일ㆍ유사한 서비스표를 출원한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한다며 판시했다.

구 상표법 규정의 취지는 타인과 계약관계 등을 통해 타인이 사용하거나 사용 준비 중인 상표(선사용상표)를 알게 된 사람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해 동일·유사한 상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재판부는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원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안효주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