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법 개정…'고용 창출'을 최우선 목표로 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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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춘의 블루 라운지
코로나 사태 맞아 가장 큰 변화 맞는 고용시장
고용창출이 중앙은행 최대의 목표
코로나 사태 맞아 가장 큰 변화 맞는 고용시장
고용창출이 중앙은행 최대의 목표
특정기관법의 첫 조항은 해당 기관의 설립 목적을 담는다. 한국은행법 1조도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모든 법(목적)은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이 전제조건이 흐트러지면 실질적으로 법을 위반하더라도 어떤 귀책이 따르지 않고 오히려 법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경제적 렌트가 발생해 현실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대부분 중앙은행이 설립할 당시 현실은 인플레이션이 최대 골칫거리였다. 인플레이션이 초래하는 많은 부작용 가운데 부(富)의 재분배를 초래해 해당국 국민의 대다수가 속해있는 중하위 계층일수록 어려워진다. 발권력과 최종 대부자 역할을 갖고 있는 중앙은행법에 물가안정 목표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물가안정 목표도 199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물가를 끌어내리는 ‘인플레이션 파이터’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의 역할은 1970년대까지는 비교적 잘 지켜졌다. 실물과 금융 간 연계성 문제를 놓고 격리됐다고 봤던 전통적인 통화론자들은 ‘어빙 피셔의 화폐수량설(MV=PT, M; 통화공급량, V: 통화유통속도, P; 물가, T; 거래량 혹은 국민소득)’에 따라 돈의 공급을 줄이고, 연계됐다고 봤던 케인즈언들은 ’통화정책 전달경로(기준금리 변경→총수요 변화→실물경기 조정)‘에 따라 기준금리를 올리면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가 1979년 제2차 오일 파동 이후 들이닥친 스테그플레이션 국면이다. 국제유가 급등과 같은 총공급 요인에 경기가 침체되고 물가가 오르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을 맞아 미국 중앙은행(Fed)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융긴축을 단행하면 경기가 더 침체되고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융완화를 추진하면 물가가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폴 볼커 당시 Fed 의장은 과감하게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목표를 달성했다는 차원에서 높게 평가하는 시각이 있으나, 당시 감세를 통해 금리 인상에 따른 실물경기 충격을 흡수시킨 레이건노믹스(공급중시 경제학)가 추진되지 않았더라면 실물경기와 물가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악화시켰을 것이라는 정책 실수 차원에서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스테그플레이션을 극복하는 과정은 중앙은행에게 두 가지 큰 교훈을 던졌다. 하나는 종전과 다른 현실이 닥쳤을 때 물가안정만을 고집하다간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정책 실수‘로, 실물경기 회복 등과 같은 다른 목적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다른 하나는 물가안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통화와 재정 간 ’정책 조화(목표가 많아지면 수단과 같아야 한다는 틴버겐 정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깨닫게 됐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 역할에 결정적으로 변화를 초래했던 때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제3차 산업이 주도했던 1990년대 후반이다. 자원의 희소성 법칙에 따라 생산할수록 공급능력이 떨어지는(수확 체감의 법칙) 제조업과 달리 네트워크만 깔면 깔수록 공급능력이 확대되는(수확 체증의 법칙) 제3차 산업이 한 나라 경제를 주도할 경우 성장률이 높아지더라도 물가는 안정되는 신경제 국면이 도래했다.
중앙은행으로서도 더이상 좋아질 수 없는 골디락스 국면을 맞았다. 골디락스란 어느 배고픈 소녀가 숲속을 가다가 곰이 차려놓은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음식을 먹었다는 영국의 한 전래동화에서 유래된 용어다. 앨런 그린스펀 당시 Fed 의장은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은행 위상은 하늘을 치를 듯 높아졌고 중앙은행 직원은 ‘신의 직장’으로 평가됐던 황금기였다.
어느 사람이든 간에 굶주렸을 때 뜻하지 않은 계기로 음식이 앞에 놓으면 먹을 수밖에 없는 유혹에 빠진다. 맛이 좋고 나쁨을 떠다 배를 채우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체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상한 음식을 먹으면 나중에 큰 고통이 따른다. 신경제 국면에서 Fed와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이 실수했던 것은 물가안정만을 고집하다가 날로 심해지는 부동산 등에 끼기 시작했던 거품을 방치한 점이다.
자산 거품이 심해지자 당황한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이 뒤늦게 2004년부터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으나 1990년대 이후 진전돼온 세계화 과정에서 경제 위상이 부쩍 높아진 중국의 미국 국채매입으로 시장금리는 거꾸로 떨어지는 ‘그린스펀 수수께기’ 현상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자산 거품이 더 심해지면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사태에 이어 2009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2004년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의 금리인상 조치는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에 있어서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중앙은행이 ‘주력산업 교체’, ‘세계화’라는 현실을 외면한 채 물가안정만을 고집하다간 통화정책의 생명인 ‘선제적(preemptive’ 대응이 어렵게 되고, 정책 실기는 나중에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엄청난 후폭퐁과 비용을 치른다는 점이다. 통화정책 관할대상도 더이상 실물경기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뒤늦게 반성한 각국 중앙은행의 변신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선봉장에 섰던 Fed는 2012년부터 전통적인 물가안정에 고용 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했다. 1913년 설립 이후 물가안정만을 고집해온 Fed로서는 100년 만에 대변신이다. 통화정책 관할대상도 ‘그린스펀 독트린’에서 ‘버냉키 독트린’으로 넓어졌다. 전자는 통화정책을 실물경기만을 고려해 추진해야 한다는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의 주장인데 반해 후자는 실물경기뿐만 아니라 자산시장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밴 버넹키 전 Fed 의장의 주장이다.
또다른 10년, 2020년대 첫해를 맞아 각국 중앙은행과 통화정책 여건에서도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전환점을 맞고 있다. 뜻하지 않았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통화정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중국은 지난달 27일에 끝난 19기 5중 전회에서 42년 만에 수출에서 내수 위주의 쌍순환 전략을 채택했다. 내년 1월 20일이면 미국 대통령도 도널드 트럼프에서 조 바이든 당선자로 교체된다. 코로나 사태 맞아 가장 큰 변화가 일고 있는 곳이 고용시장이다.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은 사람과 사람 간에 이동을 격리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K’자형 경기가 심화되면서 중하위 계층을 중심으로 직장에서 완전히 쫓겨나가는 영구 실업자가 급등하는 추세다. 미국만 하더라도 영구 실업자가 380만명에 달한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돼 상용화된다 하더라도 영구 실업자를 비롯한 대규모 실업 사태가 쉽게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오히려 중하위 계층의 대규모 실업자가 세력화돼 고소득층과 기득권에 저항할 경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중대한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제46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미국이 ‘트럼프국’과 ‘바이든국’으로 분리됐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가시화되고 있다.
당선 윤곽이 잡히자마자 ‘통합’과 ‘화합’을 강조한 조 바이든 당선자가 주요 직책에 대한 인선이 속속 발표하는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재닛 옐런 재무장관 내정자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에 이어 여성 첫 재무장관이라는 화려한 이력 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로 어려워진 미국 경제를 어떤 처방으로 구해낼 것인가가 관심이 되고 있다.
어떤 정책이든 복잡한 현실을 푸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차가 길고 논리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경제정책일수록 더 어렵다. 이 때문에 특정 경제이론에 의존하기보다는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에 기여했던 종전의 정책처방을 참고로 하는 실증적 방법이 많이 활용된다.
평가의 준거 틀로 삼아왔던 여러 정책 처방 가운데 앨런 재무장관 내정자가 1999년 4월 예일대 동문회에서 연설했던 ‘예일 거시경제 패러다임'이 애용돼 오고 있다. 특히 바이든 당선자가 부통령으로 근무했던 버락 오마바 정부 시절 경제정책의 근간이 되면서 당시 최대 난제였던 금융위기를 극복하는데 적용됐다.
예일 패러다임의 출발은 1950년부터 1988년 은퇴할 때까지 예일대에서 화폐 경제학을 가르쳤던 제임스 토빈이다. 정책적으로는 아서 오쿤, 로버트 솔로우, 케네스 애로우 교수 등과 함께 1960년대 케네디와 존슨 정부 시절에 실행됐던 경제정책을 설계하는데 핵심역할을 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월리엄 노드하우스, 로버트 쉴러 교수 등이 뒤를 이었다.
전체적인 기조는 경기침체, 위기극복 등과 같은 단기과제 해결은 케인즈언 이론을 선호하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기반과 완전고용 등과 같은 장기과제는 신고전학파 이론을 받아들인 독특한 정책 처방 패키지이다. 즉, 단기과제는 총수요와 총공급(혹은 IS/LM) 곡선으로 이해하고, 지속 가능 성장과 고용 창출 등의 장기과제는 토빈과 솔로우 모델을 선택했다.
정책수단은 재정정책보다 통화정책이 더 유용하다고 봤다. 이 때문에 재정정책은 경기부양을 위해 일시적으로 적자 폭이 커지더라도 ‘재정 건전화’의 틀은 깨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통화정책은 물가가 어느 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완만한 인플레이션이 경제 활력을 북돋는데 바람직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최종 목표인 장기성장과 완전고용을 위해서는 물적자본, 인적자본,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정부는 재정 건전화를 도모하고, 통화당국은 통화완화 기조를 유지해 기업이윤이 높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제도 투자세액공제제도를 도입하고, 소비세율을 높여 저축과 투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봤다.
예일 패러다임을 토대로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1960년대와 1990년대 미국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토빈 교수가 케네디 정부에 정책 자문했던 1961년 이후 106개월 동안 확장 국면이 지속됐다. 1990년대에는 예일대 교수들이 다시 클린턴 정부와 손을 잡으면서 확장 국면이 2001년 3월까지 120개월 동안 지속됐다.
예일 패러다음은 미국 이외 국가에서도 활용됐다. 1990년 이후 ‘엔고(高)의 저주’에 걸려 20년 이상 침체국면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교수의 발권력을 통한 엔저 유도 권고를 받아들여 ’잃어버린 30년‘ 우려를 차단한 아베노믹스가 대표적인 예다. 고이치 교수는 토빈의 제자이다.
예일 패러다임대로 바이든 시대 추진될 경제정책을 예상해 보면 거시 기조는 ‘분배’보다 ‘성장’, 목표는 ‘물가안정’보다 ‘고용창출’에 우선순위를 두는 가운데 운영방식은 ‘준칙’보다 ‘재량적’ 방식, 시장과의 관계는 ‘우월적’보다 ‘친화적’으로 운용할 가능성이 높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간 비중은 후자에 무게를 두되, Fed와의 협조를 중시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인 J노믹스는 재정지출은 늘리고 통화정책 기조는 보수적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추경을 4차례나 편성했다. 반면에 통화정책은 코로나 사태 직후 두 차례 금리를 내리긴 했지만 다른 국가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다. ‘재정 건전화’와 ‘금융완화’ 간 조합을 기본 토대로 하는 예일 패러다임과는 다른 인상을 준다. 하루 빨리 한국은행은 물가안정과 함께 고용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해 보다 과감하게 금융완화를 추진해야 한다. 현재 우리 경제 여건상 예일 패러다임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한다면 기준금리는 0% 내외로 내리고, 유동성 조절정책은 갈수록 고질화돼 가는 병목 현상을 풀기 위해 최소한 ‘타깃팅 양적완화’를 도입해야 할 때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대부분 중앙은행이 설립할 당시 현실은 인플레이션이 최대 골칫거리였다. 인플레이션이 초래하는 많은 부작용 가운데 부(富)의 재분배를 초래해 해당국 국민의 대다수가 속해있는 중하위 계층일수록 어려워진다. 발권력과 최종 대부자 역할을 갖고 있는 중앙은행법에 물가안정 목표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물가안정 목표도 199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물가를 끌어내리는 ‘인플레이션 파이터’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의 역할은 1970년대까지는 비교적 잘 지켜졌다. 실물과 금융 간 연계성 문제를 놓고 격리됐다고 봤던 전통적인 통화론자들은 ‘어빙 피셔의 화폐수량설(MV=PT, M; 통화공급량, V: 통화유통속도, P; 물가, T; 거래량 혹은 국민소득)’에 따라 돈의 공급을 줄이고, 연계됐다고 봤던 케인즈언들은 ’통화정책 전달경로(기준금리 변경→총수요 변화→실물경기 조정)‘에 따라 기준금리를 올리면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가 1979년 제2차 오일 파동 이후 들이닥친 스테그플레이션 국면이다. 국제유가 급등과 같은 총공급 요인에 경기가 침체되고 물가가 오르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을 맞아 미국 중앙은행(Fed)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융긴축을 단행하면 경기가 더 침체되고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융완화를 추진하면 물가가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폴 볼커 당시 Fed 의장은 과감하게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목표를 달성했다는 차원에서 높게 평가하는 시각이 있으나, 당시 감세를 통해 금리 인상에 따른 실물경기 충격을 흡수시킨 레이건노믹스(공급중시 경제학)가 추진되지 않았더라면 실물경기와 물가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악화시켰을 것이라는 정책 실수 차원에서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스테그플레이션을 극복하는 과정은 중앙은행에게 두 가지 큰 교훈을 던졌다. 하나는 종전과 다른 현실이 닥쳤을 때 물가안정만을 고집하다간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정책 실수‘로, 실물경기 회복 등과 같은 다른 목적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다른 하나는 물가안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통화와 재정 간 ’정책 조화(목표가 많아지면 수단과 같아야 한다는 틴버겐 정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깨닫게 됐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 역할에 결정적으로 변화를 초래했던 때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제3차 산업이 주도했던 1990년대 후반이다. 자원의 희소성 법칙에 따라 생산할수록 공급능력이 떨어지는(수확 체감의 법칙) 제조업과 달리 네트워크만 깔면 깔수록 공급능력이 확대되는(수확 체증의 법칙) 제3차 산업이 한 나라 경제를 주도할 경우 성장률이 높아지더라도 물가는 안정되는 신경제 국면이 도래했다.
중앙은행으로서도 더이상 좋아질 수 없는 골디락스 국면을 맞았다. 골디락스란 어느 배고픈 소녀가 숲속을 가다가 곰이 차려놓은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음식을 먹었다는 영국의 한 전래동화에서 유래된 용어다. 앨런 그린스펀 당시 Fed 의장은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은행 위상은 하늘을 치를 듯 높아졌고 중앙은행 직원은 ‘신의 직장’으로 평가됐던 황금기였다.
어느 사람이든 간에 굶주렸을 때 뜻하지 않은 계기로 음식이 앞에 놓으면 먹을 수밖에 없는 유혹에 빠진다. 맛이 좋고 나쁨을 떠다 배를 채우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체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상한 음식을 먹으면 나중에 큰 고통이 따른다. 신경제 국면에서 Fed와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이 실수했던 것은 물가안정만을 고집하다가 날로 심해지는 부동산 등에 끼기 시작했던 거품을 방치한 점이다.
자산 거품이 심해지자 당황한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이 뒤늦게 2004년부터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으나 1990년대 이후 진전돼온 세계화 과정에서 경제 위상이 부쩍 높아진 중국의 미국 국채매입으로 시장금리는 거꾸로 떨어지는 ‘그린스펀 수수께기’ 현상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자산 거품이 더 심해지면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사태에 이어 2009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2004년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의 금리인상 조치는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에 있어서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중앙은행이 ‘주력산업 교체’, ‘세계화’라는 현실을 외면한 채 물가안정만을 고집하다간 통화정책의 생명인 ‘선제적(preemptive’ 대응이 어렵게 되고, 정책 실기는 나중에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엄청난 후폭퐁과 비용을 치른다는 점이다. 통화정책 관할대상도 더이상 실물경기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뒤늦게 반성한 각국 중앙은행의 변신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선봉장에 섰던 Fed는 2012년부터 전통적인 물가안정에 고용 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했다. 1913년 설립 이후 물가안정만을 고집해온 Fed로서는 100년 만에 대변신이다. 통화정책 관할대상도 ‘그린스펀 독트린’에서 ‘버냉키 독트린’으로 넓어졌다. 전자는 통화정책을 실물경기만을 고려해 추진해야 한다는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의 주장인데 반해 후자는 실물경기뿐만 아니라 자산시장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밴 버넹키 전 Fed 의장의 주장이다.
또다른 10년, 2020년대 첫해를 맞아 각국 중앙은행과 통화정책 여건에서도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전환점을 맞고 있다. 뜻하지 않았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통화정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중국은 지난달 27일에 끝난 19기 5중 전회에서 42년 만에 수출에서 내수 위주의 쌍순환 전략을 채택했다. 내년 1월 20일이면 미국 대통령도 도널드 트럼프에서 조 바이든 당선자로 교체된다. 코로나 사태 맞아 가장 큰 변화가 일고 있는 곳이 고용시장이다.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은 사람과 사람 간에 이동을 격리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K’자형 경기가 심화되면서 중하위 계층을 중심으로 직장에서 완전히 쫓겨나가는 영구 실업자가 급등하는 추세다. 미국만 하더라도 영구 실업자가 380만명에 달한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돼 상용화된다 하더라도 영구 실업자를 비롯한 대규모 실업 사태가 쉽게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오히려 중하위 계층의 대규모 실업자가 세력화돼 고소득층과 기득권에 저항할 경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중대한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제46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미국이 ‘트럼프국’과 ‘바이든국’으로 분리됐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가시화되고 있다.
당선 윤곽이 잡히자마자 ‘통합’과 ‘화합’을 강조한 조 바이든 당선자가 주요 직책에 대한 인선이 속속 발표하는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재닛 옐런 재무장관 내정자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에 이어 여성 첫 재무장관이라는 화려한 이력 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로 어려워진 미국 경제를 어떤 처방으로 구해낼 것인가가 관심이 되고 있다.
어떤 정책이든 복잡한 현실을 푸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차가 길고 논리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경제정책일수록 더 어렵다. 이 때문에 특정 경제이론에 의존하기보다는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에 기여했던 종전의 정책처방을 참고로 하는 실증적 방법이 많이 활용된다.
평가의 준거 틀로 삼아왔던 여러 정책 처방 가운데 앨런 재무장관 내정자가 1999년 4월 예일대 동문회에서 연설했던 ‘예일 거시경제 패러다임'이 애용돼 오고 있다. 특히 바이든 당선자가 부통령으로 근무했던 버락 오마바 정부 시절 경제정책의 근간이 되면서 당시 최대 난제였던 금융위기를 극복하는데 적용됐다.
예일 패러다임의 출발은 1950년부터 1988년 은퇴할 때까지 예일대에서 화폐 경제학을 가르쳤던 제임스 토빈이다. 정책적으로는 아서 오쿤, 로버트 솔로우, 케네스 애로우 교수 등과 함께 1960년대 케네디와 존슨 정부 시절에 실행됐던 경제정책을 설계하는데 핵심역할을 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월리엄 노드하우스, 로버트 쉴러 교수 등이 뒤를 이었다.
전체적인 기조는 경기침체, 위기극복 등과 같은 단기과제 해결은 케인즈언 이론을 선호하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기반과 완전고용 등과 같은 장기과제는 신고전학파 이론을 받아들인 독특한 정책 처방 패키지이다. 즉, 단기과제는 총수요와 총공급(혹은 IS/LM) 곡선으로 이해하고, 지속 가능 성장과 고용 창출 등의 장기과제는 토빈과 솔로우 모델을 선택했다.
정책수단은 재정정책보다 통화정책이 더 유용하다고 봤다. 이 때문에 재정정책은 경기부양을 위해 일시적으로 적자 폭이 커지더라도 ‘재정 건전화’의 틀은 깨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통화정책은 물가가 어느 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완만한 인플레이션이 경제 활력을 북돋는데 바람직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최종 목표인 장기성장과 완전고용을 위해서는 물적자본, 인적자본,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정부는 재정 건전화를 도모하고, 통화당국은 통화완화 기조를 유지해 기업이윤이 높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제도 투자세액공제제도를 도입하고, 소비세율을 높여 저축과 투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봤다.
예일 패러다임을 토대로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1960년대와 1990년대 미국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토빈 교수가 케네디 정부에 정책 자문했던 1961년 이후 106개월 동안 확장 국면이 지속됐다. 1990년대에는 예일대 교수들이 다시 클린턴 정부와 손을 잡으면서 확장 국면이 2001년 3월까지 120개월 동안 지속됐다.
예일 패러다음은 미국 이외 국가에서도 활용됐다. 1990년 이후 ‘엔고(高)의 저주’에 걸려 20년 이상 침체국면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교수의 발권력을 통한 엔저 유도 권고를 받아들여 ’잃어버린 30년‘ 우려를 차단한 아베노믹스가 대표적인 예다. 고이치 교수는 토빈의 제자이다.
예일 패러다임대로 바이든 시대 추진될 경제정책을 예상해 보면 거시 기조는 ‘분배’보다 ‘성장’, 목표는 ‘물가안정’보다 ‘고용창출’에 우선순위를 두는 가운데 운영방식은 ‘준칙’보다 ‘재량적’ 방식, 시장과의 관계는 ‘우월적’보다 ‘친화적’으로 운용할 가능성이 높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간 비중은 후자에 무게를 두되, Fed와의 협조를 중시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인 J노믹스는 재정지출은 늘리고 통화정책 기조는 보수적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추경을 4차례나 편성했다. 반면에 통화정책은 코로나 사태 직후 두 차례 금리를 내리긴 했지만 다른 국가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다. ‘재정 건전화’와 ‘금융완화’ 간 조합을 기본 토대로 하는 예일 패러다임과는 다른 인상을 준다. 하루 빨리 한국은행은 물가안정과 함께 고용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해 보다 과감하게 금융완화를 추진해야 한다. 현재 우리 경제 여건상 예일 패러다임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한다면 기준금리는 0% 내외로 내리고, 유동성 조절정책은 갈수록 고질화돼 가는 병목 현상을 풀기 위해 최소한 ‘타깃팅 양적완화’를 도입해야 할 때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