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기업할 자유' 공약하지 않았나
2020년은 한국 제조업 경쟁력의 정수를 보여준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제조 기업들은 코로나19로 위태했던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기업인들의 자화자찬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우리 경제가 내년에 정상 궤도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낙관론을 펼친 배경에는 지난 3분기 2.1% 성장(잠정치)이라는 팩트가 자리잡고 있다. 이 숫자를 들춰보면 제조업 기여도가 90%가 넘는다. 미미한 수준에 그친 정부 지출 기여도와 서비스업의 마이너스 성장을 만회한 일등공신이다.

당연시되는 기업의 고군분투

제조업 경쟁의 기반은 수출이다. 내수와 달리 수출은 고도로 효율화된 기업만이 할 수 있는 경제 행위다. 한국의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가 단적인 예다. 대척점에 서 있는 애플과 비교하면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명확하다. 애플의 ‘정체’는 SCM(서플라이 체인 매니지먼트·공급망 관리)이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뒤 최고경영자(CEO)를 맡은 팀 쿡은 취임 후 재고를 기존 한 달분에서 6일치로 줄였다. 전략적 공급업체 수는 100개에서 24개로 줄이고, 무한경쟁 체제로 몰았다. 애플과 거래한 모든 기업은 무자비한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갑질’에 고개를 젓는다.

삼성전자는 전 세계에서 애플과 대등한 게임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업이다. 천하의 애플도 삼성전자의 D램을 최소한 30%는 써야 한다. 복수의 조달체계를 갖춰야 리스크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플이 유력 경쟁자인 삼성을 회피하려면 또 다른 D램 업체를 잡아야 하고, 그에 따른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은 삼성전자가 누린다. 1등의 프리미엄은 이렇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데 있다.

‘삼성전자급’은 아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의 제조업체는 1500개(통계청 기업생멸통계) 정도다. 현재 활동 중인 625만 개 국내 기업 중 매출이 1000억원 이상인 제조업체 수다. 이들이 대외의존도 70%가 넘는,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우리 경제의 태생적인 취약 구조를 방어하는 방어막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정치가 기업의 가장 큰 위협

우려스러운 지점은 한국을 끌고 온 제조업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는 데 있다. 기업 생태계가 건강하기 위해선 새로운 기업이 끊이지 않고 나와야 한다. 우리나라의 종업원 50인 이상 신생 기업 수는 연간 500곳 안팎이다. 2014년 1013개를 기록하는 등 2011년부터 4년 연속 1000개 수준을 유지하다가 2016년 553개, 2017년 424개, 2018년 512개로 절반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더 큰 우려는 ‘경제의 정치화’다. 제조업의 고군분투를 당연하게 여기며, 정부가 베푼 시혜의 결과쯤으로 돌리려는 정치권의 아전인수가 기업을 사지로 몰고 있다. 각종 규제 입법으로 기업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업 활동의 근간이 되는 상법조차 정치적 이해관계와 표 계산에 휘둘려 유례없는 개악(改惡)이 이뤄졌다. 기업인들 사이에선 “정치가 그 어떤 경쟁자보다 가장 큰 위협”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자신의 SNS에서 “제조업을 한국 경제의 보석으로 불러 마땅하다”며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진정한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립서비스에 그칠 게 아니라 그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선거 때마다 기업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겠다고 한 약속만 지켜달라.” 올 한 해 코로나19와 사투하며 힘겹게 버틴 기업인들의 마지막 호소다.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