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중한 기회 놓친 조선통신사의 행적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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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조선통신사의 파견한 목적과 행적들
조선과 일본 간 강화 분위기 조성
조선, 일본에 9차례나 통신사 파견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던 통신사들
조선과 일본 간 강화 분위기 조성
조선, 일본에 9차례나 통신사 파견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던 통신사들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조선 정부와 대마도 사이에는 강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약탈전쟁이 실패한 탓에 무사와 백성들의 염전(厭戰) 분위기가 높아졌고, 토지의 황폐화로 사회의 토대가 흔들렸다. 참전 세력과 치열한 내전 끝에 승리한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신 정권을 안정시키고, 외국의 인정을 받아 정통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신속한 전후처리를 위해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조선도 무너진 사회체제와 왕조의 권위,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고, 민심의 안정을 위해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또한 명나라는 멸망 직전이었고, 북방에서는 여진족들의 압박이 시작됐다. 이미 어선들이 서해 연안을 침범하고, 청나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조선 침공의 위기가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현실적으로 국가의 생존과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배후의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컸다.
통신사의 행적
![귀중한 기회 놓친 조선통신사의 행적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https://img.hankyung.com/photo/202012/01.23568241.1.jpg)
신유한 일행은 3척의 사신선과 식량, 식수, 물자, 상인들을 실은 종선 3척 등 6척에 479명이 승선했다. 이처럼 400~500명의 대인원 속에는 정사·부사·서장관을 비롯해 각 분야의 인재와 기술자 선원들, 그밖에 비공식적인 인원들이 포함됐다. 현재 남은 ‘조선통신사 행렬도’ 가운데 가장 긴 것은 길이 25m인데, 580개의 가마, 119필의 말, 4,800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대규모이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컸지만 행사경비, 예단, 무역품 등으로 경비지출이 과다했고, 특히 일본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손승철 《조선 통신사의 길 위에서》).
통신사들의 일본 인식과 행로

조선통신사들은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등으로 부르고, 일본을 섬오랑캐(島夷), ‘올빼미’라고 하며 무시했다. 하의를 벗고, 흑치를 한 풍습을 보면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부족하고, 시문에 서투르다고 무시했다. 실제로 도시에서조차 통신사들의 성리학 지식과 한문 및 서예에 감동을 하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신유한 때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곤혹을 치른 사실들이 여러 곳에서 기록됐다. 일본의 문물과 제도에 감탄하는 신유한조차 그들의 글이 졸(卒)하고 우습다고 표현했다. 또 1636년에 온 김세렴은 조그만 항구에서 일본의 전선을 관찰한 후 일본 전선이 우리 배보다 못하다고 평가한다 (《해행총재》의 역주본).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서 침략 당사국에 파견한 사절단이라면 강한 애국심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초기에는 전쟁 상황의 규명과 책임론을 거론하고, 국가의 위상을 확립하면서 백성들의 자의식을 살려야 한다. 아울러 청나라의 침략이라는 현실에 대응할 방법론도 일본 측과 논의하고 찾아야 했다.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까지 이어진 일본이라는 ‘창(window)’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고, 서구 문화와 사상, 기술 등을 도입하고, 진보한 세상을 지향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하지만 관찰력과 변별력, 지적 능력이 뛰어난 통신사들은 현실성이 부족하고, 관념적인 성리학적인 세계에 사로잡혀 지적능력의 과시에 시간을 낭비했고, 귀중한 기회를 놓쳤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