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벤처캐피털의 바이오 편식
창업 초기 회사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C)을 미국에선 ‘30마일 비즈니스’라고 부른다. 30마일이면 50㎞가 채 안 되는 거리다. 지근거리에 있어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회사에 투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험자본이 리스크를 최대한 제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성인 한국벤처캐피털협회장은 “VC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자신 있는 분야에 자금을 집중하는 전략”이라며 “미국 VC업계의 전문성과 다양성이 탁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국내 VC 시장도 외형으로 보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중소 규모의 신생 운용사들이 대거 뛰어들면서 VC협회 회원 수는 160개를 넘겼다. 올 들어 3분기까지 116개 벤처펀드가 새롭게 결성됐다. 2조8485억원에 달하는 자금이 벤처기업에 투입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상반기에 위축됐던 투자가 3분기 들어 살아난 것이 눈에 띈다. 이런 추세면 작년에 이어 올해도 4조원 이상의 자금이 스타트업들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전망이다.

2년 연속 4조원대 투자

하지만 투자 대상을 놓고 보면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업계에서 나온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관심이 높아진 바이오 분야로만 돈이 몰리고 있어서다. VC협회에 따르면 올해 신규 투자금액의 27%가 바이오·의료 기업으로 흘러 들어갔다. 3년 전 16%에서 껑충 뛰어올랐다. 이 기간 전기·기계·장비 등 전통적인 제조업 비중은 10%에서 6%대로 쪼그라들었다. 바이오 비중이 절반 가까이로 오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얘기도 들린다.

여기에 지난주 한국투자파트너스의 황만순 최고투자책임자(CIO)가 새 대표로 내정됐다는 소식은 바이오 대세론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서울대 약학 석사 출신인 그는 한국 VC업계에서 바이오 심사역의 대표 선수로 꼽힌다. 에이비엘바이오, 지놈앤컴퍼니, 티움바이오, 진매트릭스, 레고켐바이오 등 바이오 시장을 달군 여러 기업이 진작부터 그의 선택을 받았다. 회사가 국내 VC 1위는 물론이고 바이오 부문의 강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VC의 임원은 “바이오 전문가가 대형 VC의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된 걸 보니 벤처시장의 큰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약 10년 전부터 제약사 연구원 출신들이 VC로 활발하게 진출해 임원과 팀장급에 여럿 포진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비슷한 사례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벤처생태계 건강해져야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바이오 기업, 특히 신약 부문은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후보물질 발굴에서부터 전임상·임상·판매 허가까지 10년 이상이 필요한 경우가 허다하다. 한 바이오 심사역은 “투자 기업의 가치가 갑자기 올라버리면 당초 예상했던 투자 기간 이전에라도 자금을 회수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게 된다”며 “마치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바이오 광풍의 이면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일부 VC들이 제조업 분야에도 활발하게 투자하며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미래에셋벤처투자는 센코, 삼영에스앤씨, 민테크 등 친환경 제조기업에 성공적으로 투자했다. 전력 소모가 없는 전기화학식 가스센서를 만드는 센코는 최근 상장하면서 이 VC에 여덟 배 이상의 평가이익을 안겨주기도 했다. 예비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을 발굴해 한국 경제의 신성장 동력을 구축하는 것만큼이나 벤처 생태계를 건전하게 조성하는 것도 VC업계의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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