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지뢰밭 주총'이 두려운 기업들
헤지펀드 소버린자산운용과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내년에 SK와 현대자동차를 다시 공격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핵심 요직인 감사(사외이사 겸직) 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상법 개정으로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개별 3%룰’이 도입돼 기업들의 방어 장치가 무력화된 탓이다. 내년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기업들엔 비상이 걸렸다.

펀드를 통한 ‘지분 쪼개기’는 쉽지만, 기업들은 우호지분 1%를 확보하는 일도 어렵다. 헤지펀드들은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부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먹잇감’ 물색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게 경제계의 추측이다.

해외 투기자본들은 공격 목표를 정하면 1년 이상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펌 등과 계약을 맺고 해당 기업의 지배구조는 물론 법령 체계, 여론까지 체크한 뒤 소리 없이 공격에 나선다. 현행법상 5% 미만 지분 보유는 공시의무가 없다. 외국계 펀드들이 지분을 3% 이하로 분할 보유하면 사전에 알기 어려워 기업들이 대부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2003년 SK를 공격한 소버린도 국내 법규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소버린은 SK 지분 15% 이상을 확보하면 전기통신사업자인 SK텔레콤 때문에 외국인투자자의 의결권이 제한된다는 점을 알고 14.99%를 사들였다. 감사위원 선임 때 의결권 제한(3%)을 피하기 위해 지분을 5개 펀드로 분산시켰다.

소버린은 2004년 주총에서 사외이사 후보 5명을 추천했지만 이사선임 단계에서 SK그룹 우호지분에 밀려 부결됐다. 개정된 상법에 따라 이사진을 먼저 뽑지 않고 이사가 될 감사위원을 분리 선출한다면 소버린 같은 투기세력이 감사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SK는 경영권 방어 비용으로 약 1조원을 썼고 소버린은 2005년 1조원가량의 차익을 얻고 빠져나갔다.

2005년 KT&G 지분 6.6%를 확보하며 2대주주에 오른 칼아이칸연합은 지분을 3개 펀드에 분산한 뒤 주주제안을 통해 사외이사 1명을 선임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도 헤르메스가 삼성물산을, 엘리엇이 삼성과 현대자동차그룹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엘리엇은 정부도 찬성한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방안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거여(巨與)의 ‘입법폭주’ 후폭풍이 조만간 현실화할 전망이다. 감사를 새로 선임해야 하는 기업들은 내년 3월 주총이 두렵기만 하다. 적대적 세력이나 투기 펀드에 감사를 내주면 기업 기밀이 고스란히 빠져나가게 된다.

코로나19 여파로 내년 사업계획조차 제대로 짜지 못한 기업들은 남은 3개월 동안 특수관계인을 최대한 늘리거나 백기사(우호 지분)를 ‘급구’해야 할 처지다. 막대한 에너지와 자금을 쏟아부어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기업에 시한폭탄을 던져놓고 뒷일은 나 몰라라 하는 정치권의 행태는 무책임의 극치”(경제단체 관계자)라는 울분이 터져나올 만하다.

‘기업들이 이번에도 어떻게든 헤쳐나가겠지’ 하는 생각이라면 오판이다. ‘규제 만능주의’ 정부와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권,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에 시달려온 기업들의 체력과 멘탈은 붕괴 직전이다. 투기세력의 공격으로 핵심 사업에 차질을 빚거나 경영권을 빼앗기는 기업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의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율은 평균 30.41%이지만, ‘개별 3%룰’을 적용하면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 지분율 평균은 5.52%로 뚝 떨어진다.

기업이 외부 세력의 공격에 신경 쓰지 않고 경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않고선 투자도, 일자리 창출도 공염불일 뿐이다. 포이즌 필 등 경영권 방어 장치를 시급히 도입해야 하는 이유다.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가 기업을 이렇게까지 벼랑 끝으로 내몬다는 말인가”라는 한 기업인의 절규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