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늑장' 변명만 하는 정부…"먼저 맞은 나라 한두달 관찰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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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 의견과 다른 정부 대응
“최대한 많이 신속 접종” 주장에
정부 “안전 위해 속도조절 필요”
“전문가들 의견 무시하더니
백신 조기 확보할 기회 놓쳤다”
“최대한 많이 신속 접종” 주장에
정부 “안전 위해 속도조절 필요”
“전문가들 의견 무시하더니
백신 조기 확보할 기회 놓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이 개발돼 일부 국가에서 접종이 시작됐다. 하지만 우리는 한번도 들어간 적 없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있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은 23일 긴급 브리핑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하루 1000명 넘게 확진자가 이어지는 엄중한 상황에서 백신 확보도 늦어지는 국내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국내 겨울 대유행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의료 자원이 고갈되고 있지만 정부는 한결같이 ‘의료 붕괴 상황은 아니다’고 했다. 백신 확보도 마찬가지다. 한두 달 늦어져도 괜찮다는 정부 인식은 ‘최대한 많은 양을 확보해 신속히 접종해야 한다’는 의료계 주장과도 다르다. 정부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이유다.
그는 “세계 처음 시작하는 나라도 집단면역 형성까지 짧게는 반 년, 길게는 9~10개월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이 기간 예방접종 대상 우선순위를 정해 범위를 넓혀나가고, 백신에 대한 기대감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사태를 막아 안정시키는 것을 각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백신 안전성을 위해 접종 속도를 늦추는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취지다.
물론 백신이 나왔다고 팬데믹(대유행)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전문가도 백신 보급 이후의 유행을 더 걱정한다. 백신만 믿고 거리두기 등에 소홀해지면 더 큰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는 한국이 충분한 양의 백신을 손에 쥐고 있을 때의 얘기다. 한국 정부가 계약서에 사인한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에서 개발하고 있는 임상 3상시험이 끝나지 않은 백신 1000만 명분뿐이다. 임상 3상시험이 끝난 화이자, 모더나 제품은 아직 계약도 마치지 못했다.
내년 안에 이들 백신 2000만 명분을 들여온다는 계획이지만 한국보다 먼저 구매한 다른 나라에 밀려 그 시기는 하반기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개발도 마치지 못한 제품만 손에 쥐고 “다른 나라 접종 상황을 보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셈이다.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지난 22일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 배송을 받은 싱가포르는 올해 안에 접종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올해 4월부터 백신 확보를 위한 준비를 했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정부가 말한 10개월이 무슨 근거인지 모르겠다”며 “정부 말대로라면 국내보다 사망자가 적은 싱가포르는 왜 그런 선택을 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정부가 ‘솔직히 판단을 잘못했다’ ‘전문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하면 되는데 변명에 변명만 하고 있다”고 했다.
전날 청와대가 문재인 대통령의 백신 확보 지시사항을 발표한 뒤 야당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누구냐’는 것을 두고 논란이 있던 때다. 보건복지부가 질병청으로 책임을 미루려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보건의료계 관계자는 “질병청 독립 후 만들어진 감염병예방법에는 복지부 장관이 질병청장의 대다수 권한을 함께 갖도록 돼 있다”며 “질병청이 독자적으로 의사결정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고 책임만 지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백신 확보는 각국의 경제 재개 속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서 발표한 이달 코로나19 회복탄력성(리질리언스) 순위에서 한국은 지난달보다 네 계단 내려간 8위였다. 1위는 뉴질랜드, 2위는 대만이었다.
한국은 백신 접근성 순위(인구 대비 백신 확보율)에서 70.8%로 33위에 올랐다. 76.6%로 32위를 차지한 중국 바로 다음이다. 캐나다(511.3%), 영국(294.7%), 뉴질랜드(246.8%)가 각각 1~3위를 차지했다. 록다운 심각도 점수는 63점으로 24위다. 대만은 19점으로 1위, 뉴질랜드는 22점으로 2위였다. 이들 나라는 자유로운 일상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메르스중앙병원 상황실장을 지낸 권용진 서울대병원 중동지사장은 “공무원 개인에게 잘못을 몰아붙이면 감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책임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며 “사회 공동의 합의와 의사결정을 거쳐 공무원 개개인이 책임지는 구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은 23일 긴급 브리핑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하루 1000명 넘게 확진자가 이어지는 엄중한 상황에서 백신 확보도 늦어지는 국내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국내 겨울 대유행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의료 자원이 고갈되고 있지만 정부는 한결같이 ‘의료 붕괴 상황은 아니다’고 했다. 백신 확보도 마찬가지다. 한두 달 늦어져도 괜찮다는 정부 인식은 ‘최대한 많은 양을 확보해 신속히 접종해야 한다’는 의료계 주장과도 다르다. 정부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이유다.
“미국, 영국과 한국은 다르다”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전략기획총괄반장은 23일 정례브리핑에서 “미국과 영국은 백신 외에 채택할 수 있는 방역 전략이 별로 없는 상황이라 백신에 전력투구를 하고 있다”며 “이런 나라를 반면교사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했다.그는 “세계 처음 시작하는 나라도 집단면역 형성까지 짧게는 반 년, 길게는 9~10개월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이 기간 예방접종 대상 우선순위를 정해 범위를 넓혀나가고, 백신에 대한 기대감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사태를 막아 안정시키는 것을 각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백신 안전성을 위해 접종 속도를 늦추는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취지다.
물론 백신이 나왔다고 팬데믹(대유행)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전문가도 백신 보급 이후의 유행을 더 걱정한다. 백신만 믿고 거리두기 등에 소홀해지면 더 큰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는 한국이 충분한 양의 백신을 손에 쥐고 있을 때의 얘기다. 한국 정부가 계약서에 사인한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에서 개발하고 있는 임상 3상시험이 끝나지 않은 백신 1000만 명분뿐이다. 임상 3상시험이 끝난 화이자, 모더나 제품은 아직 계약도 마치지 못했다.
내년 안에 이들 백신 2000만 명분을 들여온다는 계획이지만 한국보다 먼저 구매한 다른 나라에 밀려 그 시기는 하반기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개발도 마치지 못한 제품만 손에 쥐고 “다른 나라 접종 상황을 보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셈이다.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지난 22일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 배송을 받은 싱가포르는 올해 안에 접종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올해 4월부터 백신 확보를 위한 준비를 했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정부가 말한 10개월이 무슨 근거인지 모르겠다”며 “정부 말대로라면 국내보다 사망자가 적은 싱가포르는 왜 그런 선택을 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정부가 ‘솔직히 판단을 잘못했다’ ‘전문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하면 되는데 변명에 변명만 하고 있다”고 했다.
“백신 구매 책임은 질병청” 답변 논란
이날 정부는 백신 수급 관련 책임이 질병관리청에 있다고도 했다. ‘백신 구매와 도입의 최종결정권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손 반장은 “질병관리청장이 백신 구매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며 “코로나19는 범정부적으로 사무국을 수립해 지원 체계를 함께 꾸려나가고 있다”고 했다.전날 청와대가 문재인 대통령의 백신 확보 지시사항을 발표한 뒤 야당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누구냐’는 것을 두고 논란이 있던 때다. 보건복지부가 질병청으로 책임을 미루려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보건의료계 관계자는 “질병청 독립 후 만들어진 감염병예방법에는 복지부 장관이 질병청장의 대다수 권한을 함께 갖도록 돼 있다”며 “질병청이 독자적으로 의사결정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고 책임만 지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백신 확보는 각국의 경제 재개 속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서 발표한 이달 코로나19 회복탄력성(리질리언스) 순위에서 한국은 지난달보다 네 계단 내려간 8위였다. 1위는 뉴질랜드, 2위는 대만이었다.
한국은 백신 접근성 순위(인구 대비 백신 확보율)에서 70.8%로 33위에 올랐다. 76.6%로 32위를 차지한 중국 바로 다음이다. 캐나다(511.3%), 영국(294.7%), 뉴질랜드(246.8%)가 각각 1~3위를 차지했다. 록다운 심각도 점수는 63점으로 24위다. 대만은 19점으로 1위, 뉴질랜드는 22점으로 2위였다. 이들 나라는 자유로운 일상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 의사결정 한계” 지적도
정부의 의사결정 구조상 문제가 생겼을 때 회피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후 감사원 감사를 통해 복지부에서만 9명의 공무원이 징계를 받았다. 이 중 8명은 사태 초기부터 감염병 차단을 위해 애썼던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 직원이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도 당시 질병예방센터장으로 사태 해결을 위해 앞장섰지만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받았다.메르스중앙병원 상황실장을 지낸 권용진 서울대병원 중동지사장은 “공무원 개인에게 잘못을 몰아붙이면 감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책임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며 “사회 공동의 합의와 의사결정을 거쳐 공무원 개개인이 책임지는 구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