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비상 시기일수록 飛上을 꿈꾸자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난생처음 교회에 갔는데 토요예배 후 2부 순서에 노래를 불렀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에델바이스’였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후 교회에서 ‘문학의 밤’을 준비하면서 더욱 주목받게 됐고 교회에 나간 지 몇 달 만에 중고등부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그리고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성탄절 당일보다 이브가 더 다채로웠다. 성극을 비롯한 학예 발표로 성탄 전야를 보낸 후 밤을 새워 선물을 돌렸다. 이윽고 새벽이 되자 새벽송을 하고 다녔다. 이때 각 가정에서 내놓은 음식이나 선물은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고루 나눠주며 성탄의 기쁨을 함께했다.

그때의 즐거웠던 기억은 눈밭에 피어난 한 송이 에델바이스처럼 선명하고 향긋하다. 교회는 물론 세인들에게도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초월해 즐거운 절기 중의 절기였다. 거리마다 가게마다 트리가 반짝였고, 캐럴이 울려퍼졌다. 연인들에게는 사랑을 속삭이는 날이었다. 언젠가 사회주의 나라 중국에 갔을 때 거기에도 성탄 트리가 빛을 밝혔고 캐럴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언제부턴가 거리에서, 가게에서 캐럴을 듣기가 어렵게 됐다. 트리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올해 성탄절은 더욱 그렇다. 겨울이 되자 코로나19가 재확산해 교회는 20명 이내로 예배를 드리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성탄예배마저 비대면으로 드려야 하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다. 영화 ‘극한직업’의 대사처럼 “지금까지 이런 성탄절은 없었다”.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어둡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우울과 절망에 빠져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절절포’(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를 외치며 비상(非常) 시기일수록 비상(飛上)의 꿈을 꾸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가장 낮은 곳으로 아기예수님이 오신 뜻, 외롭고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성탄절의 정신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희망이다.

기독교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나누는 성탄절’을 만들기로 하고 비대면의 언택트(untact) 상황을 영적인 사랑과 교감으로 이겨내는 ‘영(靈)택트’의 성탄절 문화 회복과 사랑 나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작권 걱정 없이 들을 수 있는 캐럴과 마음이 담긴 선물을 나누면서 잔잔한 반향이 일고 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김장김치를 나누고, 방역 최전선의 의료진에게 따뜻한 정이 담긴 케이크를 전하면서 우리의 마음 또한 따스해짐을 생생하게 느꼈다.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낙심일 것이다. 차갑게 얼어붙은 비대면의 상황을 이기는 힘은 결국 고통 중에 있는 이웃과 함께하고 서로 손을 잡아 이끌며 사랑의 온도를 높이는 일이다. 정치, 이념, 노사, 남북, 계층, 남녀, 지역, 빈부 등의 온갖 갈등으로 충돌하는 초갈등사회 대한민국을 보다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힘도 관심과 사랑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에델바이스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이다. 사랑과 관심으로 코로나의 냉기를 이긴다면 불안과 우울로 힘들었던 코로나 속 성탄절이 차가운 눈보라를 견디며 피어난 한 송이 에델바이스처럼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은 성탄절. 예수의 사랑과 평화 안에서 언택트를 넘어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며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영(靈)택트의 성탄절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