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학습능력을 높여준다는 기기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특정 주파수의 소리를 들려주는 기기를 착용하면, 공부할 때는 집중력을 높여주고 수면 중에는 학습한 내용이 잘 기억된다고 해 수험생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또 ‘총명탕’이라는 기억 증진에 도움을 주고 어르신들의 치매 예방에 좋다는 약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렇듯 과거부터 ‘기억’은 늘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다. 특히 최근 빨라진 고령화 속도와 함께 치매 질환의 심각성도 커지면서, 기억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학습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한다. 우리는 경험해 온 것들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기억을 점점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살아온 과거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사라져 곧 자신의 존재를 잃게 될 것이다. 이렇듯 기억은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이며, 나 자신을 ‘나’로 존재케 한다.

기억의 중추, 해마공간기억과 위치세포

기억에 관한 연구는 지난 30년 동안 유전자 수준에서 신경 세포, 행동, 그리고 정신 분야에 이르기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해왔다. 최근에는 동물이 학습하고 기억하는 동안 뇌 신경세포의 활성을 기록하는 기술과 유전학 기술이 두드러지게 발전해 기억 연구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기억 연구는 약 70년 전 뇌전증 환자 헨리 몰리슨이 겪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1953년 심한 간질 발작을 앓고 있던 그는 양쪽 내측 측두엽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 후 몰리슨은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로써 과학자들은 내측 측두엽의 일부인 ‘해마’라는 뇌 부위가 기억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몰리슨은 평생에 걸쳐 기억 연구의 대상이 되며 기억 연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헨리 몰리슨(Henry Molaison). 기억연구의 시발점이자 최대 공헌자다. 당시엔 사생활 보호를 위해 H.M이라 불리며 수많은 과학자들의 기억 연구 대상이 되었다. / 출처=위키피디아
헨리 몰리슨(Henry Molaison). 기억연구의 시발점이자 최대 공헌자다. 당시엔 사생활 보호를 위해 H.M이라 불리며 수많은 과학자들의 기억 연구 대상이 되었다. / 출처=위키피디아
해마의 기억 형성에 대한 역할이 알려진 이후, 기억의 신경계 메커니즘 규명을 위한 연구에 가장 많이 활용된 모델은 쥐의 공간기억이다. 쥐의 해마를 제거하거나 해마의 신경세포를 억제하면 공간기억이 저해된다. 따라서 쥐가 미로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거나 먹이를 잘 찾지 못하는 행동 결과가 나타난다. 1971년 해마에서 특정 위치의 공간에 처하면 발화하는 ‘위치세포(place cell)’가 발견되었다. 공간의 변화에 따라 위치세포들의 활성도 달라져 공간을 탐색, 기억해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 발견은 뇌 속 내비게이션 시스템의 핵심 증거로 인정돼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위치세포가 공간정보뿐만 아니라 보상, 규칙, 후각단서, 혐오자극 등 공간정보 이외의 감각 정보도 표상한다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는 결국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한 시·공간의 정보들, 즉 사건들이 해마의 신경세포에 부호화되어 저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마의 정보처리 과정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얻은 수많은 정보들은 해마에서 어떻게 처리될까. 해마는 크게 해부학적, 화학적, 생리학적 특성이 다른 치상, CA3, CA1 부분으로 구성된다. 대뇌피질로부터 입력된 다양한 감각정보들이 이 부위들을 거쳐 처리된다.
필자는 기초과학연구원 시냅스 뇌질환 연구단에서 기억의 뇌신경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해마 각 부위의 기능이 무엇인지, 해마로 입력된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특히 치상은 뇌 부위 중 성인 신경 발생(adult neurogenesis, 성인의 신경 줄기세포에서 뉴런이 생성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부위다. 패턴 분리(pattern separation, 비슷하거나 중복된 정보를 다른 정보로 분리해 기억의 간섭을 줄이는 기능)가 주된 기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가 속한 연구팀은 치상이 패턴 분리에 어느 정도 공헌하지만 그것이 주요 기능은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치상과 연결된 내후뇌피질과 해마 CA3의 신경세포수를 고려했을 때, 훨씬 많은 수의 신경세포를 가진 치상에서 패턴분리가 일어나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치상 뿐 아니라 뇌의 어느 부위든 작은 단위에서 큰 단위의 신경네트워크로 정보가 전달될 때 패턴분리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치상이 패턴분리만을 위해 존재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필자는 2017년 대뇌피질에서 분리돼 들어온 다양한 감각정보들이 해마의 첫 관문인 치상에서 연합되어 처리된다는 ‘정보 연합’(binding·공간과 비공간 정보의 연합) 이론을 새롭게 제시했다.

예로 든 치상의 기능 외에도, 기억의 신경학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의문들이 해명되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다양한 내외부 정보가 해마에서 어떻게 종합되어 기억으로 저장되며, 이 과정에서 해마 각 부위인 치상, CA3, CA1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주제일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기억

필자와 같은 신경과학자들은 기억을 생성, 저장, 회상 단계로 구분한다. 그리고 각 단계는 모두 신경세포들의 활성과 세포 간 연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국의 신경과학 연구팀은 해마가 손상된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정상인보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능력, 즉 상상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NAS, 2007). 이 결과는 해마의 기능이 기억 형성뿐만 아니라, 가상 상황이나 미래 계획의 구성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결국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현재에 머물며 미래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기억은 과거-현재-미래의 연결인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수많은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의 뇌 속에 기억으로 형성되는지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대다수의 기억 연구는 주로 인간의 해마와 비슷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설치류 동물모델을 이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연구자들은 기억의 작동원리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치매와 같은 기억상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뇌전증, 그리고 해마의 병변이 주요 원인으로 밝혀진 우울증, 정신분열증 등의 정신질환 치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종원
‘제1호 국가과학자’로 불리는 세계적인 뇌 과학자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의 길 대신 유전학, 생물학 등의 기초과학을 연구하다가 1990년대 초 본격적인 뇌 연구에 뛰어들었다. 30년 가까이 뇌 연구에 매달려온 그는 IBS 대전 본원 연구실에서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실험용 생쥐와 매일 씨름하고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