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이라면 다음 결혼에 관심이 없는데 왜 오은수는 세 번 결혼하는 것을 결정하였을까. 가정과 교회는 신이 만들어준 단지 두 개의 기관이다. 평범하지만 좋은 부모를 통해 가정의 중요성을 몸에 익혔기에 오은수는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됐다.
필자는 마치 세 번 결혼한 오은수처럼 범부처사업단장에 세 번 떨어진 남자다. 왜 그랬을까. 첫 직장 쉐링플라우(S-P)부터 한국에 와서도 제약사에서만 근무하며 신약개발사업을 몸으로 배웠기에 그것 밖에 할 줄을 몰랐다. 내가 꼭 사업단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개발사업에 관여하고 싶어서 첫 도전에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도전한 것이다.
서두르지만 전후좌우 따져보며 서둘러야 하는 신약 개발
2011년 3월 29일에 코리아나호텔에서 ‘범부처전주기신약개발사업(KDDF·Korea Drug Development Fund) 공청회 및 사업단장 공모 설명회’가 열렸다. 준비위원회가 만든 디자인을 발표하는 날이기에 필자도 참석했다. 여러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삼양사에 재직하던 중 S-P에 라이센싱 차 방문해 만났던 이동호 박사, 소사이어티 오브 바이오메디컬 리서치(Society of Biomedical Research)라는 단체를 워싱턴에 만들어 한국-미국 제약사 신약 개발 종사자들 모임에서 몇 번 만났던 정재준 박사가 그날 주 강연자였다. 패널토론의 좌장은 추진위원장 권영근 교수를 포함한 학계의 방영주, 김성훈 교수였다.
업계에서는 묵현상 메디프론 대표(현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장), 조정우 SK 연구소장(현 SK바이오팜 사장), 김성수 화학연구원 선임본부장이 참석했다. 특별히 사업을 돕는 3개 부처 과장도 포함됐다. 지식경제부 강명수 과장, 교육과학부 이은영 과장, 보건복지부 정은경 과장(현 질병관리청장)이었다. 특히 신약 개발 연구지원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던 3개 부처의 과장 3인이 모인 역사적인 날이다. 산-학-연-관의 쟁쟁한 패널이다.
KDDF사업은 ‘국내 신약개발 사업현황 및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사업이다. 당시 연구주체간 협력 부족과 R&D 프로세스의 비효율을 시정하고 신약 개발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9년간의 장기적인 사업이다. 역량, 경험, 투자 모두 글로벌 기준에 비교해 미흡하지만 당시 국산 신약 18종의 경험을 가졌기에 대한민국이 신약 개발 가능한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초석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3개 부처가 독자적으로 수행하던 사업으로는 예측 가능한 상시 지원 시스템 부재로 인해 신약 연구개발 재원의 지속적인 투자가 미흡하였기에 긴 호흡의 투자로만 가능한 신약 개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국가신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역사적인 사업이었다.
디자인에 포함된 사업단장을 중심으로 운영을 하지만 사업단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투자심의위원회가 신약개발프로젝트 투자의 최종 의사결정을 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사업이었다. 경직적인 예산집행제도로 인한 무분별한 R&D 재원의 투입을 예방하고 투자형 신약 개발 사업의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사업예산의 집행잔액을 30%까지 이월 사용가능한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사업단장 신청 자격은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관리 등에 의한 규정’ 제27조에 의거 참여 제한을 받지 않는 자 및 ‘국가공무원법’ 제33조 각호의 1에 해당하지 않는자 △글로벌 신약 개발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을 보유한자 △글로벌 감각, 미래지향적 비전과 비즈니스 마인드 등 경영자로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자를 원했다. 사업단장 근무조건 중에 첫 임기는 초기 3년이지만, 평가에 따라 2년 단위 연임 가능하도록 했다. 연봉은 3억원 내외이며 성과급까지 별도로 지급하고 해외거주자의 경우 이주비 지원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외국인도 지원 가능한 정말 ‘듣보잡(Job)’이었다.
2011년 4월 29일이 신청 접수 마감이었다. 당연히 지원했다. 신청 요건에 대한 결격사유 및 제출 자료의 미비를 점검한 1차 평가에 필자도 합격했다. 5월 31일에 구두 발표 2차 평가가 진행됐다. 4명이 선정돼 발표를 했다. 이동호 서울아산병원 임상연구센터장, LG생명과학의 김애리 박사, 그리고 미국 솔크 연구소의 최승현 박사였다. 발표 전에 대기실에서 만나 서로 전공이 다르니 누가 되더라도 서로 돕자고 의견을 모았다. 대한민국 신약 개발을 위한 ‘도원결의’를 맺은 것이다. 필자가 발표 1번 타자였다.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가 제목이었다. 중세 연금술사들의 좌우명이다. 연금술사들은 화학자로 결국 약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논리적으로 모순된 표현이지만, 서두르되 전후좌우를 따져보면서 서두르라는 말이다. 신약 개발은 천천히 빨리빨리 가야 하는 그런 것이기에 제목을 그렇게 붙였다.
결국 이동호 박사와 필자가 최종 2인 후보였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최종 결정이 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나 초대단장으로 이동호 박사가 결정되자 김애리 박사와 필자는 2차 평가 때 나누었던 약속대로 KDDF의 운영에 관여하게 됐다. 현재 차약학대학에 있는 김 교수는 사업단에 속해 초대 연구개발본부장을 맡았고 필자는 투자심의위원회의 일원으로 2년 동안 투자 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드렸다. 아직도 의학, 약학, 생화학을 전공한 세 사람은 언제나 반가운 동료이며 만나면 즐거운 사이로 지낸다.
‘BACK TO THE BASIC’… 신약 개발은 과학이다
2014년 10월 23일 KDDF 2기 단장 응모 필자의 발표 제목은 ‘BACK to BASIC’이었다. 2016년 11월 15일 KDDF 3기 단장 응모의 발표 제목은 ‘답답 답은 Back to BASIC’이었다. 얼마나 정부 주도의 신약개발사업이 답답하였으면 ‘답답 답’을 앞에 붙였다. “요새처럼 나라 안팎으로 답답할 때 답은 Back to Basic입니다.” 첫 마디였다. “신약 개발은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신약 개발은 과학입니다.” 경쟁 후보가 라이센싱 아웃과 비지니스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에 대한 의도적인 외침이었다.
“현재 시점의 정보를 가지고 15년 후에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흘러가나 트렌드를 잘 읽어내야 합니다.” 지금도 필자가 세미나 때 사용하는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시작 부분을 보여주면서 “답은 1961년 뉴욕 맨하튼 남부 상공에서 찍은 것입니다”고 했다. 신약 개발에 성공하려면 맨하튼 남부가 점점으로 보일 때 그 사진을 미리 예측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의 질문은 남달랐다. “어느 나라가 국적이시지요?” 외국 국적 해외거주자의 경우 이주비 지원이 가능하다고 명시했던 사실을 벌써 잊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화가 났던 것은 후에 필자가 소유한 주식 자료를 다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요구하는 사업단 담당 직원에게 화를 냈다. “왜 주식 소유 자료가 필요하죠? 난 회사 소유를 해본 적이 없기에 주식이 없다. 머크의 401K가 내가 소유한 주식의 전부이다.” 1, 2기 때에는 없던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2015년 2대 단장이 부임한 후로는 ‘세 번 떨어지는 남자’에게는 KDDF에서 과제 심사위원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2018년 6월 2일 메디컬 전문매체 메디게이트뉴스에 첫 칼럼을 게재했다. ‘질병 타깃으로 부상한 미토콘드리아’가 주제였다. 필자가 할 줄 아는 신약 개발에 대해 동료와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맞춰 글을 올렸다. 필자가 존경하는 모 회사 대표는 “저도 한 달에 한번 써보았는데 그것도 무척 힘들던데 어떻게 매주 하나씩 쓰세요”라고 했다. 칼럼을 모아 2019년 3월 29일 책을 발간했다. 제목은 KDDF 2기, 3기 단장 응모 때 발표제목이었던 ‘신약개발 BACK to BASIC’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 ‘사람을 살리는’이 들어가 신약 개발의 목적을 분명히 포함시켰다. 5월 22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참석자들에게 같은 제목으로 비록 8분이지만 강의할 기회까지 가졌다.
GDDF가 더 큰 열매 맺으려면
2, 3기 단장 심사위원을 담당한 한 후배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배님은 경험도, 능력도 출중하시지만 관(官)과의 연결이 가장 약하신 게 약점입니다.” 신랑의 들러리는 결혼식과 이어진 파티에서 신랑을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기에 ‘세 번 떨어진 남자’보다 신약 개발 파티를 즐기는 ‘세 번 들러리 선 남자’가 맞을 것 같다. 필자는 오늘도 대한민국이 글로벌 신약 개발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신약 개발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이 칼럼을 쓴다. 업그레이드가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2021년에도 칼럼은 계속될 것이다.
KDDF가 올해 GDDF로 새로 출범한다고 한다. 신약 개발 스타트업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사업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결실을 맺을까. 2011년 고심 끝에 설계된 ‘기업형 사업단’ 디자인에 충실하도록 짓는 것이다. R&D 보조금 지원이 아닌 글로벌 신약 프로젝트를 발굴해 투자하는 것이다. 최종 선정은 사업단장을 포함한 투자심의위원회에서 만장일치(1기 투심이 그랬던 것처럼)로 결정하고 R&D 관리는 마일스톤 리뷰를 통해 사업단장이 Go 또는 No-Go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디자인으로 돌아가면 지난 9년간 대한민국 신약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KDDF보다 GDDF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업계 동료들이 농담조로 “선배님, 한 번 더 지원하시지요”라고 한다. ‘네 번 떨어지는 남자’는 당치도 않다.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열연하는 이지아 배우가 ‘네 번 결혼하는 여자’에 출연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배진건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8년 JW중외제약에서 연구총괄 전무를 지냈고 C&C신약연구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아브노바 연구소장과 한독 상임고문을 거쳐 현재 이노큐어테라퓨틱스 수석부사장이자 우정바이오 신약클러스터 기술평가단장을 맡고 있다. 국내외 신약 개발 분야의 석학으로, 저서로는 <사람을 살리는 신약개발(Back to BASIC)>이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