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용퇴' 강요당한 56세 김 전무
기업에서 12월은 논공행상의 달이다. 사업 목표를 초과 달성한 조직에는 두툼한 보너스가 돌아간다. 임원 승진도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다. 새 최고경영자(CEO)와 요직으로 이동한 고위 임원이 누구인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다. 새로 ‘별’을 단 임원이 누군지도 관심사다. 최연소 임원, 승진 연한을 뛰어넘은 발탁 승진자 등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올해도 주요 기업들은 대규모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다. CEO를 바꾼 기업은 많지 않았지만 임원 교체 폭은 예년보다 컸다. 삼성과 LG에서도 각각 425명과 177명의 임원 승진자가 나왔다. 두 그룹사 모두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세대교체”를 내세우며 지난해보다 임원 승진자 규모를 늘렸다.

빛의 반대편엔 그림자가 있다. 주요 기업에서 임원의 자리는 제한돼 있다. ‘젊은 피’를 임원으로 기용하려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내줘야 한다. ‘임원=임시직원’이란 우스갯소리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퇴출시키느냐다.

올해 만으로 56세인 A사의 김모 전무는 인사 발표 전날 인사팀으로부터 ‘방출’을 통보받았다. 내부적으로 정한 ‘나이 기준’에 걸렸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만 55세도 안 된 상무급 후배 임원 중에도 옷을 벗은 사례가 있다”며 “성과가 아니라 나이를 문제삼으니 항의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만 58세에 ‘용퇴’한 B사 이모 부사장도 비슷한 사례다. 그는 “공식적으로 인사팀에서 나이 기준을 거론하진 않지만 매년 암묵적인 임원 직급별 커트라인이 제시된다”며 “CEO가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인사팀에 강력히 소명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고 말했다.

주요 기업 인사팀이 나이를 따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한 인사팀 관계자는 “누가 봐도 확실한 업적을 냈거나 결격 사유가 뚜렷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고 털어놨다. 대과가 없는 수준인 대다수 임원의 업적 지표를 보면서 ‘유임’과 ‘퇴출’을 결정하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였다. 이 관계자는 “세대교체라는 명분이 있고, 당사자가 대놓고 문제삼기도 힘든 지표”라며 “나이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 특유의 연장자 존중 문화가 ‘연령 커트라인’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발탁 인사를 통해 고위직에 오른 젊은 임원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후배 임원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감안, 연령 커트라인을 빡빡하게 적용한다는 지적이다.

대기업 임원 자리가 ‘별’에 비유되는 것은 거기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아서다. 입사 동기가 100명이라면 그중 단 한 명만 임원이 된다. 업무 역량에 대한 증명이 어느 정도 끝난 인재라는 얘기다. 자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창 일할 나이의 인재들을 내치는 것은 기업 전체의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후배들을 위해 자리가 필요하다면 기존 임원의 권한과 대우를 조정하는 게 정석이다.

살아남은 임원들이 어떤 마음으로 일할지도 염두에 둬야 한다. 나이 기준에 걸려 정년보다 빨리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은 단기 실적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선 1~2년 만에 성과가 나오기 어려운 긴 호흡의 장기 프로젝트가 굴러가기 어렵다.

화려한 발탁 인사가 성공하려면 ‘용퇴 전략’에도 신경 써야 한다. ‘젊은 인재 우대’란 슬로건을 ‘나이 많은 인재 홀대’로 이해하는 임원이 많다면 그 회사의 인사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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