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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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에세이 - 장석주 시인
보라, 동해안 간절곶 위로 씻긴 듯
말간 새날의 첫 해가 불끈 솟는다.
오늘의 해가 뜨고
오늘의 새가 노래하는 땅 위에서
누구를 위해 새해 첫 해가 뜨느냐고
묻지 마시라.
희망은 멀리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서 숨 쉬는 것,
그게 희망이다.
보라, 동해안 간절곶 위로 씻긴 듯
말간 새날의 첫 해가 불끈 솟는다.
오늘의 해가 뜨고
오늘의 새가 노래하는 땅 위에서
누구를 위해 새해 첫 해가 뜨느냐고
묻지 마시라.
희망은 멀리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서 숨 쉬는 것,
그게 희망이다.
금빛 햇살이 누리에 퍼질 때 섬진 강물은 빛을 뒤채며 흐르고, 지리산은 의연하게 솟아 있다. 고요하던 담양 대숲과 진주 남강 대숲, 울산 태화강 십리대숲이 지저귀는 새들로 술렁거린다. 보라, 동해안 간절곶 위로 씻긴 듯 말간 새날의 첫 해가 불끈 솟는다. ‘고난의 행군’ 같은 날들은 지나가리라. 어제와는 작별하자. 오늘의 해가 뜨고 오늘의 새가 노래하는 땅 위에서 누구를 위해 새해 첫 해가 뜨느냐고 묻지 마시라. 어린 자식을 교목(喬木)처럼 키우며 저마다 생업에 충실한 이들을 위해 평화로운 시절이 돌아오리라. 해가 뜨고 달이 솟는 것을 즐거워하자. 새해에는 사랑하고, 마시고, 기도하며 살아가자. 누구나 태어나면 일곱 겹의 삶을 살아야 한다. 희망은 멀리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서 숨 쉬는 것, 그게 희망이다. 삶이 시와 음악을 잉태한다면, 희망은 우리를 미래로 데려다줄 것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이라는 재난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일상의 작은 안녕과 평화는 깨지고, 우리는 낯선 세계 속에서 길을 잃었다. 학교도, 공연장도, 도서관도 문을 닫았다. 폐업한 가게들이 빠져나간 상가는 공실들이 생기며 썰렁했다. 해외여행도 불가능했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담소를 나눌 수도 없었다. 택배노동자는 하루 16시간씩 노동에 내몰리다 목숨을 잃고, 펄펄 끓는 쇳물에 추락한 철강노동자는 찰나에 그 존엄한 삶의 작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부동산 투기꾼들이 제철 만난 메뚜기 떼처럼 날뛸 때 아파트 매매가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솟구쳤다. 이 지옥 같은 소동 속에서도 정치는 편을 갈라 말꼬리를 붙잡고 분열과 정쟁을 일삼았다.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바이러스 전염병의 대유행은 우리의 안녕과 소소한 꿈을 불안으로 집어삼켰다. 굶주림에 뼈와 가죽만 남은 개가 돌아오듯이 우리는 한 번도 겪지 못한 재난의 한 해를 견디며 걸어왔다.
혹시 우리는 나쁜 별에 불시착한 불운한 사람들일까? 날이 갈수록 왜 세상은 각박해지고, 삶은 팍팍해질까? 태어남 자체가 비극이고 불편한 것이다. 나는 입에 들어오는 음식을 의심하고, 소소한 기쁨을 의심하고, 이웃의 다정한 말과 미소를 의심했다.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고, 따라서 감사할 줄도 몰랐다. 우리는 너무 많은 책들, 너무 많은 음식들, 너무 많은 친구들, 너무 많은 약속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우리는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너무 넘쳐서 불행했다. 풍요 속 가난이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는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가장 작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세 끼의 식사, 보온 양말, 햇빛, 의자. 그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을까? 오, 우리는 언제쯤 “웅덩이에 비친 해의 잔영만으로도 충분”(페르난두 페소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새해 들머리에서 한 해를 회고하며 허망함에 진저리를 치는 것은 내가 정말 뜨겁게 살지 못한 까닭이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여러 일들을 도모하고 펼쳤으나 끝내지 못한 채 한 해의 끝에 닿기 일쑤였다.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모든 중요한 마음의 다짐들은 작심삼일로 끝났다. 우리는 ‘절반의 생’을 살았던 건 아닐까? 절반의 인생, 절반의 사랑, 절반의 희망에 목숨을 건 듯이 산 건 잘못된 일이다. 절반만 사는 것은 온전한 삶에 한참 못 미치는 삶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절반의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고/그대가 하지 않은 말이고/그대가 뒤로 미룬 미소이며/그대가 느끼지 않은 사랑이고/그대가 알지 못한 우정이다./(중략)/절반의 삶은 그대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는 것이다./절반의 물은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고/절반의 식사는 배고픔을 충족시키지 못한다./절반만 간 길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절반의 생각은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칼릴 지브란, ‘절반의 생’) 오, 절반의 정의, 절반의 실천, 절반의 생각만으로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지은 건 정직하지 못한 태도다. 그건 허세이고, 공허한 몸짓이었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0도 이하로 떨어져 천지가 얼어붙은 밤, 그림자와 유령들도 잠들고 들판엔 삭풍만 부는 밤들을 우리는 버텨냈다. 존재가 영도(零度)로 돌아가는 밤들. 새벽 거리를 비루먹은 개처럼 떠도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길고양이 한 마리라도 동사한다면 그건 우리의 탓이다. 우리가 얻은 따뜻한 밥과 편안한 잠자리는 다른 누군가 누릴 것을 빼앗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마다 가는 길이 다르고 삶은 따로 있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인류라는 대륙의 일부다. 차가운 재 속의 숨은 불씨를 살려내듯 희망을 살려내자. 그게 살아남은 자가 지켜야 할 도리고, 도덕적 책무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도 흥얼거리자. 먼 데 있는 친구의 안부를 묻고, 앵두나무에 꽃 피면 앵두나무에 꽃 피었다고 서툰 시라도 적어 보내자. 야경꾼처럼 밤을 도와 책을 읽고, 가난과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자.
우리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희망을 노래해야 할 분명한 까닭이 있다. 버티고 살아온 날의 힘이 앞으로 남은 날을 살아갈 동력이 될 것이다. 발꿈치를 들고 저 먼 곳을 바라보자. 비록 발은 시궁창을 딛고 있어도 저 높은 창공에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자. 언젠가 돌아올 가슴 벅찬 희망의 날들을 기다리자. 겨울 새벽마다 마당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있고, 아침마다 자식들의 옷을 다리미질하는 어머니가 있다. 저 먼 곳에서 봄은 오고 있다. 씨앗과 둥근 뿌리들이 땅 밑에서 움틀 준비를 하고, 한겨울에도 나무들은 새로운 잎눈을 키운다. 겨울이 제 안쪽에 봄을 기를 때 누군가 귓가에 속삭인다. “살아라, 뻗어라, 피어라, 바라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져 삶을 두려워 말아라!”(헤르만 헤세, ‘봄의 말’) 봄은 우리에게 심장이 쿵쿵 뛰듯 열심히 살라고 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가 시련에 쉬이 꺾이지 않는 존재, 웃음과 기쁨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배우기 위함이다. 결국 코로나19는 물러날 것이다. 자, 두려움을 떨쳐내자! 그리고 웃어라, 그러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모진 세월, 지켜야 할 사랑이 있기에
이제껏 겪지 못한 이상한 날들과 앞날이 가늠되지 않는 혼돈의 세월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나침반도, 지도도 없이 우리는 용케도 길 잃지 않고 잘 왔구나! 우리는 단단한 씨앗처럼 시련과 수고를 견디고 살아남았다. 지금 낮은 지붕 아래 슬픔과 모욕을 모르는 아이들은 꿈속을 헤맨다. 아이들은 쫓기는 꿈을 꾸며 키가 부쩍 자라고, 어른들은 근심 속에서 미지의 땅에 불시착한 이들이 구조를 기다리듯 내일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새벽에 깨어 보채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제빵사들은 오늘의 빵을 굽고, 의사는 위중한 환자의 병상을 지키고, 시인은 단 한 구절을 쓰기 위해 고뇌에 빠지고, 천문학자는 새로 나타난 별의 궤적을 좇느라 바쁘다. 섣달그믐 한밤중에 태어난 송아지는 힘겹게 네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서 씩씩하게 제 어미젖을 빤다. “우리는 목청 높여 노래하고, 빈속에 약과 술을 먹고/울적한 노래로 마음을 모질게 다졌다.”(아틸라 요제프) 우리가 이를 악물고 모질게 마음을 다지며 혼돈의 세월을 견딘 것은 지켜야 할 사랑이 있고, 보듬어야 할 마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코로나19의 팬데믹이라는 재난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일상의 작은 안녕과 평화는 깨지고, 우리는 낯선 세계 속에서 길을 잃었다. 학교도, 공연장도, 도서관도 문을 닫았다. 폐업한 가게들이 빠져나간 상가는 공실들이 생기며 썰렁했다. 해외여행도 불가능했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담소를 나눌 수도 없었다. 택배노동자는 하루 16시간씩 노동에 내몰리다 목숨을 잃고, 펄펄 끓는 쇳물에 추락한 철강노동자는 찰나에 그 존엄한 삶의 작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부동산 투기꾼들이 제철 만난 메뚜기 떼처럼 날뛸 때 아파트 매매가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솟구쳤다. 이 지옥 같은 소동 속에서도 정치는 편을 갈라 말꼬리를 붙잡고 분열과 정쟁을 일삼았다.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바이러스 전염병의 대유행은 우리의 안녕과 소소한 꿈을 불안으로 집어삼켰다. 굶주림에 뼈와 가죽만 남은 개가 돌아오듯이 우리는 한 번도 겪지 못한 재난의 한 해를 견디며 걸어왔다.
혹시 우리는 나쁜 별에 불시착한 불운한 사람들일까? 날이 갈수록 왜 세상은 각박해지고, 삶은 팍팍해질까? 태어남 자체가 비극이고 불편한 것이다. 나는 입에 들어오는 음식을 의심하고, 소소한 기쁨을 의심하고, 이웃의 다정한 말과 미소를 의심했다.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고, 따라서 감사할 줄도 몰랐다. 우리는 너무 많은 책들, 너무 많은 음식들, 너무 많은 친구들, 너무 많은 약속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우리는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너무 넘쳐서 불행했다. 풍요 속 가난이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는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가장 작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세 끼의 식사, 보온 양말, 햇빛, 의자. 그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을까? 오, 우리는 언제쯤 “웅덩이에 비친 해의 잔영만으로도 충분”(페르난두 페소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고통의 날들 또한 지나가리니
사랑하는 사람들아, 이 혼돈과 고통의 날들 또한 지나가리니, 부디 살아 있으라.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다. 그때 기다림은 우리 인생을 낭비하는 헛된 광대놀음에 지나지 않지만 인생의 태반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진실이다. 베르그송은 기다림이 내 마음대로 연장하거나 단축할 수 없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간이 간다고 하지만, 정작 가는 것은 사람들이다. 다만 시간은 한 공간에 균질한 빛처럼 뿌려지고 있다. 지혜로운 이들은 기다림의 시간을 내적 성장의 계기로 바꾼다. 빠른 성과와 결과를 요구하는 시대에는 기다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지체에 불과하게 보인다. 모든 게 빛의 속도로 처리되는 오늘날 기다림은 지루함과 불편을 낳는 원인이 될 뿐이다. 사람들은 단 몇 초도 참고 기다릴 줄 모른다. 그러나 우정과 포도주가 그렇듯이, 가장 좋은 것들은 항상 기다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그리움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고요한 시절을 기다려야 한다.새해 들머리에서 한 해를 회고하며 허망함에 진저리를 치는 것은 내가 정말 뜨겁게 살지 못한 까닭이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여러 일들을 도모하고 펼쳤으나 끝내지 못한 채 한 해의 끝에 닿기 일쑤였다.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모든 중요한 마음의 다짐들은 작심삼일로 끝났다. 우리는 ‘절반의 생’을 살았던 건 아닐까? 절반의 인생, 절반의 사랑, 절반의 희망에 목숨을 건 듯이 산 건 잘못된 일이다. 절반만 사는 것은 온전한 삶에 한참 못 미치는 삶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절반의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고/그대가 하지 않은 말이고/그대가 뒤로 미룬 미소이며/그대가 느끼지 않은 사랑이고/그대가 알지 못한 우정이다./(중략)/절반의 삶은 그대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는 것이다./절반의 물은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고/절반의 식사는 배고픔을 충족시키지 못한다./절반만 간 길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절반의 생각은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칼릴 지브란, ‘절반의 생’) 오, 절반의 정의, 절반의 실천, 절반의 생각만으로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지은 건 정직하지 못한 태도다. 그건 허세이고, 공허한 몸짓이었다.
절반의 정의는 공허한 몸짓
다시 생각해 봐도 지난해는 참 이상했다. 집밖을 나설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사람을 피해야만 했다. 제야의 타종식도 취소되고, 타종식 때 몰리던 인파도 없었다. 우리는 격리된 장소에 머물고, 사회 활동은 비대면 방식으로 바꾸도록 권고받았다. 우리가 누리던 작은 즐거움들이 불가능해졌을 때 비로소 그게 귀하고 아름다운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월트 휘트먼의 시집 《풀잎》이나 헝가리 국민시인 아틸라 요제프의 시집 《일곱 번째 사람》을 읽으며 고통의 날들을 견뎌냈다. 다시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활보하고,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가방을 꾸리고, 카페에 나가 벗들과 담소를 나누고 싶다.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0도 이하로 떨어져 천지가 얼어붙은 밤, 그림자와 유령들도 잠들고 들판엔 삭풍만 부는 밤들을 우리는 버텨냈다. 존재가 영도(零度)로 돌아가는 밤들. 새벽 거리를 비루먹은 개처럼 떠도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길고양이 한 마리라도 동사한다면 그건 우리의 탓이다. 우리가 얻은 따뜻한 밥과 편안한 잠자리는 다른 누군가 누릴 것을 빼앗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마다 가는 길이 다르고 삶은 따로 있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인류라는 대륙의 일부다. 차가운 재 속의 숨은 불씨를 살려내듯 희망을 살려내자. 그게 살아남은 자가 지켜야 할 도리고, 도덕적 책무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도 흥얼거리자. 먼 데 있는 친구의 안부를 묻고, 앵두나무에 꽃 피면 앵두나무에 꽃 피었다고 서툰 시라도 적어 보내자. 야경꾼처럼 밤을 도와 책을 읽고, 가난과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자.
시궁창을 딛고 있어도 별을 바라보자
이제 묵은 달력을 내리고 새해 달력을 걸자. 언 땅이 녹은 양지에 복수초가 먼저 피어나 새 봄의 도래를 알리겠지. 매화 애기동백 유채꽃 산수유꽃이 다투어 피고, 벌들이 잉잉대며 꿀을 모으는 동안 우리도 바쁘겠지. 땡볕 내리쬐는 한여름엔 붉은 보석같이 속이 꽉 찬 수박을 베어 먹으며 더위를 견디겠지. 늦가을 내장산에 번지는 절정의 단풍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곱고, 폭설 내린 뒤 한라산의 설경은 시리도록 아름답겠지. 지리산 노고단 너머 능선을 따라 지친 걸음을 옮기다가 서편 하늘에 걸친 장밋빛 황혼은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장엄했다. 임진강변에 나갔다 돌아온 날은 동지였다. 한 해 중 가장 밤이 긴 날 저녁 팥죽 한 그릇으로 위를 채우며 위로를 받았다. 힘든 시절에도 사람들은 새 집을 짓고, 아기들이 태어나고, 새 노래들이 나와 세상에 퍼진다.우리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희망을 노래해야 할 분명한 까닭이 있다. 버티고 살아온 날의 힘이 앞으로 남은 날을 살아갈 동력이 될 것이다. 발꿈치를 들고 저 먼 곳을 바라보자. 비록 발은 시궁창을 딛고 있어도 저 높은 창공에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자. 언젠가 돌아올 가슴 벅찬 희망의 날들을 기다리자. 겨울 새벽마다 마당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있고, 아침마다 자식들의 옷을 다리미질하는 어머니가 있다. 저 먼 곳에서 봄은 오고 있다. 씨앗과 둥근 뿌리들이 땅 밑에서 움틀 준비를 하고, 한겨울에도 나무들은 새로운 잎눈을 키운다. 겨울이 제 안쪽에 봄을 기를 때 누군가 귓가에 속삭인다. “살아라, 뻗어라, 피어라, 바라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져 삶을 두려워 말아라!”(헤르만 헤세, ‘봄의 말’) 봄은 우리에게 심장이 쿵쿵 뛰듯 열심히 살라고 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가 시련에 쉬이 꺾이지 않는 존재, 웃음과 기쁨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배우기 위함이다. 결국 코로나19는 물러날 것이다. 자, 두려움을 떨쳐내자! 그리고 웃어라, 그러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