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100년 만에 살아난 문예지 '백조'의 숨은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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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권 4호 계간지로 복간
휘문·배재 출신 20대 문학청년
3·1운동 실패 후 새 출구 모색
홍사용, 고향 땅 팔아 비용 대
이상화·나도향 등 명작 산실
발행인은 아펜젤러 등 외국인
일제 검열 피하려고 명의 빌려
고두현 논설위원
휘문·배재 출신 20대 문학청년
3·1운동 실패 후 새 출구 모색
홍사용, 고향 땅 팔아 비용 대
이상화·나도향 등 명작 산실
발행인은 아펜젤러 등 외국인
일제 검열 피하려고 명의 빌려
고두현 논설위원
![[고두현의 문화살롱] 100년 만에 살아난 문예지 '백조'의 숨은 주역들](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07.21340772.1.jpg)
1919년 3·1운동에 앞장선 그는 일제에 체포돼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그에게 비애와 좌절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무렵 배재학당(현 배재고) 출신의 동년배 소설가 나도향(1902~1926)과 박영희(1901~?)를 만났다. 두 사람도 3·1운동 실패 후 절망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야유회를 함께 떠난 이들은 시대의 아픔을 치유할 잡지를 발행하기로 의기투합했다.
편집인은 홍사용이 맡았지만 발행인을 누가 맡느냐가 골치였다. 일제의 검열과 간섭을 피하려면 발행인을 외국인에게 맡겨야 했다. 결국 미국인 선교사이자 배재학당 교장이던 헨리 도지 아펜젤러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1921년 말 편집을 마치고 이듬해 1월 9일자로 ‘백조’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 동인지를 통해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같은 걸작이 빛을 봤으니, ‘백조’는 한국 근대 낭만주의의 샛별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훗날 박종화는 당시의 낭만주의 사조와 관련해 “우리들이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는 환경에 있고, 3·1운동을 치른 뒤 온 절망이 자연히 이 길로 젊은 문학도를 끌고 들어가게 했다”고 회고했다.
잡지 표지는 동인 화가 안석주와 원세하가 그렸다. 창간호 표지에는 청자 형태 속에 전통 옷을 입고 생각에 잠긴 여성이 그려져 있다. 속표지에는 바닷가에 앉은 여인의 나신과 이를 내려다보는 아기천사가 배치돼 있다. 한국의 전통과 서구적인 분위기를 함께 살리려 애쓴 흔적이 동인들의 문학적 지형과 닮았다.
100년 전 이들이 만든 ‘백조’라는 거대한 물결이 한 세기를 넘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21세기 문학인들이 ‘백조’를 계간지로 복간하기로 하고 3호에 이어 4호를 발행했다. 옛 선배들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백조’를 “어두운 시대에 밝은 물결이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마중물 역할을 한 매개체”(김태선), “개인을 추구하면서도 대중을 경애한 작업”(권보드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왕복 승차권”(최가은)이라고 평가했다.
'백조' 부활의 산실 노작홍사용문학관

노작은 ‘이슬에 젖은 참새’라는 뜻으로, 홍사용의 호(號)다. 시인의 호 중에서도 특히 멋스럽다. 그의 무덤이 있는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에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있다. 이 근처의 반석산 뒤를 끼고 흐르는 오산천은 아산만을 지나 서해까지 가 닿는다. ‘백조’가 창간된 100년 전에는 이곳까지 서해의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 배들이 그려낸 하얀 물결이 백조(白潮)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2018년부터 관장을 맡은 그는 홍사용이 극단 토월회와 산유화회에서 활동한 극작가였다는 점에 착안해 문예지 ‘시와 희곡’을 창간했다. 이어 노작홍사용 창작단막극제를 개설했고, 최근에는 ‘백조’ 복간호까지 펴냈다. 그런데도 잡지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숨은 주역’이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