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시장 입지 다지는 中, 이라크에 '석유 담보 구제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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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코로나19에 '휘청' 틈타
파격 조건에 원유 공급 계약
"이라크에 中 경제 영향력 늘 것"
파격 조건에 원유 공급 계약
"이라크에 中 경제 영향력 늘 것"
이라크가 중국과 원유 선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사실상 석유를 담보로 중국으로부터 1년간 무이자 대출을 받는 계약이다. 중국이 저유가 시기 주요 산유국이 휘청이는 것을 기회삼아 석유 시장 영향력을 늘려가는 모양새다.
3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알라 알 아시리 이라크 석유수출공사(SOMO) 대표는 이날 이라크 국영매체 INA에 “중국 석유기업과 약 20억달러(약 2조1600억원) 규모 원유 선불 계약을 체결했다”며 “여러 제안 중 유럽기업과 중국기업 사이 치열한 경쟁이 있었고, 중국 기업이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고 말했다.
이번 계약으로 이라크는 오는 7월부터 5년간 중국에 매달 평균 400만배럴 규모 원유를 공급하게 된다. 이중 1년간 공급에 대해 선불을 받는다. 아시리 SOMO 대표는 “이라크는 20억달러를 무이자로 끌어쓰게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SOMO는 계약을 체결한 중국 기업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블룸버그통신과 S&P플래츠 등은 각각 소식통을 인용해 이 기업이 중국 젠화오일이라고 보도했다. 젠화오일은 중국 국영 방산업체인 노린코(중국병기공업그룹) 산하 무역·정유기업이다. 중국 국무원 중국국유재산감독관리위원회(SASAC)가 간접 소유하고 있다. 젠화오일 홈페이지에 따르면 일평균 원유와 석유제품 약 130만배럴 규모를 거래한다.
주요 산유국 이라크가 이같은 ‘선불제’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SOMO는 작년 11월 각국 정유사 등에 1년치 원유공급에 대한 선불 계약 제안서를 보냈다. 현지 매체 등은 이라크가 최근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어 이례적인 선불 계약에 나섰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이번 거래를 통해 역내 영향력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오일프라이스닷컴은 “중국이 이라크에 석유 거래 형식으로 사실상 구제금융을 내준 것”이라며 “중국이 이라크 석유시장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에겐 저유가 시기 가격으로 석유 ‘자유이용권’을 산 셈이다. SOMO에 따르면 이번 계약은 중국이 원유 선적 시기를 비롯해 수출 목적지를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 목적지를 중국 외 다른 곳으로 정해 원유를 재판매해도 된다. 통상 중동산 원유가 엄격한 재매각 금지 조건이 붙은 채 팔리는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계약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라크가 사실상 무이자 대출을 끌기 위해 재매각 금지 조건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라크에너지연구원의 예사르 알말레키 본부장은 “중국이 낮은 가격선에 상당량의 원유 공급을 확보한 것”이라며 “최근 유가가 오름세라 좋은 시점에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이라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두번째로 큰 석유 수출국이지만 최근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작년 3월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유가 폭락으로 큰 경제 타격을 입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주요 산유국이 관광업 등에 투자해 원유 의존도를 늦춘 반면 이라크는 정부 수입의 90% 가량을 원유수출에 의존하고 있어 특히 피해가 컸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라크 경제는 지난해 다른 OPEC 소속국보다 12% 더 위축됐다. 지난달엔 이라크 디나르의 달러 대비 가치가 약 20% 급락했다.
이라크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라크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도 어려워졌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내년 가장 취약한 채권 발행국 중 하나로 이라크를 꼽았다.
지난달 세계은행(WB)은 코로나19와 저유가로 인해 이라크인 550만명이 빈곤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재정난에 정치혼란도 가중되고 있다. 이라크 정부가 몇달간 공무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으면서 항의 시위가 빗발쳤다.
블룸버그통신은 “원유 수요가 높은 중국은 그간 이라크와 긴밀한 경제 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해왔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2019년엔 이라크와 ‘인프라 대 원유’ 협정을 체결했다. 이라크에 진출해 있는 중국 기업이 이라크 인프라 공사를 해주는 대신 일평균 10만배럴 원유를 이들 기업에 제공하는 계약이었다.
지난달엔 CNOOC(중국해양석유),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이라크 내 서쿠르나 대유전의 엑슨모빌 소유 지분을 인수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 외교전문지 더디플로맷은 “젠화오일 등이 중국 인민군의 ‘에너지 글로벌화’ 전략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며 “이번 계약으로 중국이 이라크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