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관해 물으면 "나는 한 가지밖에 없다"고 답했다.
한 가지를 끝없이 파고들었고, 그 한 가지로 세계적인 거장이 됐다.
1972년 검푸른 단색 바탕 위에 투명한 물방울이 떠 있는 '밤의 행사'(Event of Night)를 시작으로 구순이 넘어서까지 그린 물방울은 고인의 삶 자체였다.
김창열은 1929년 대동강 상류 작은 마을 맹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15세, 모친은 20세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34세였던 조부가 그를 보살폈다.
명필가였던 조부는 어린 손자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당시 배운 천자문은 훗날 물방울 작업에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우등생이었던 김창열은 화가가 되겠다고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에 선언했지만, 어른들은 극구 반대했다.
광복 후 1946년 월남해 서울에 온 김창열은 피난수용소에서 1년 가까이 지냈다.
다음 해에야 먼저 월남한 부친과 극적으로 만났다.
부친은 그제야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더 말리지 않았다.
이쾌대 미술연구소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김창열은 검정고시를 거쳐 1949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됐지만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김창열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여동생을 잃고 친구들을 잃었다.
초기작에도 전쟁의 상처가 드러난다.
총을 맞아 구멍 뚫린 형상은 '상흔', 사람이 찢긴 듯한 이미지는 '제사'라는 작품 제목으로 그려졌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방울도 전쟁의 고통과 연결된다.
고인은 물방울의 의미에 대해 "시대의 상처를 내포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총 맞은 육체를 연상시키는 전쟁 직후 작업에 대해 "그 상흔 자국 하나하나가 물방울이 됐다"고 했다.
"물방울은 가장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고 무(無)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 상흔 때문에 나온 눈물이에요.
그것보다 진한 액체는 없어요.
"
김창열은 폐허가 된 조국을 떠나 1965년 미국으로 갔다.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뉴욕에 머문 4년도 어두운 시간이었다.
변변치 않은 일거리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당시 팝아트만 주목받던 그곳에서 그의 작업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69년 뉴욕보다 다양성이 있었던 파리로 가면서 그는 다시 용기를 얻고 작품 활동에 나선다.
지금과 같은 물방울 그림은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살롱 드 메'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세계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물방울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 혹은 운명이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했던 김창열은 프랑스 파리 근교의 낡은 마구간에 머물며 작업했다.
어느 날 아침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담다가 캔버스에 물이 튀었다.
김창열은 "크고 작은 물방울이 캔버스 뒷면에 뿌려지니까 햇빛이 비쳐서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더라"라고 물방울 작업을 시작한 계기를 설명한 바 있다.
물방울 작업은 50년 가까이 이어졌다.
1980년대부터는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렸고 마대에 한자체나 색점, 색면 등을 채워 넣어 동양적 정서를 살렸다.
1980년대 말부터는 인쇄체로 쓴 천자문 일부가 투명한 물방울과 화면에 공존하는 '회귀' 연작이 이어졌다.
김 화백이 소중히 간직하던 대표작 220점을 기증해 지난 2016년 제주도에 김창열미술관이 개관했다.
개관 기자간담회에서 고인은 평생 매달린 물방울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내가 못나서 계속 그리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3년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도 그는 "물방울이 무슨 의미가 있나.
무색무취한 게 아무런 뜻이 없지. 그냥 투명한 물방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욕심은 그런 물방울을 갖고 그림을 만드는 것이었고 한평생 그렇게 살아왔다"라며 "너절하지 않고 있으나 마나 하지 않은 화가로 후대에 남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냥 물방울"이라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다.
'물방울 화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물방울은 오늘도 투명하고 영롱하게 빛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