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부자가 된 건가, 화폐가 타락한 건가
화폐로 표시된 거의 모든 자산 가격이 오름세다. ‘코스피 3000’이란 가본 적 없는 고원(高原)에 도달했는가 하면, 지난해 5월 600만원대이던 비트코인은 4700만원(8일)을 찍은 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원자재도 뛴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50달러대로 치솟았고, 구리도 t당 약 8000달러로 10년 만의 최고치다. 안전자산인 금(金)과 채권만 상대적 약세다.

서울 평균 아파트값은 3.3㎡(평)당 4000만원을 넘어섰다. 수도권은 물론 지방 대도시도 30평대가 10억원을 훌쩍 넘겼고 15억원 이상도 속출한다. 100만달러라야 11억원 정도이니, ‘명목상 백만장자’가 된 셈이다. ‘벼락거지’라는 유행어도 ‘벼락부자’가 많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한국인은 정말 부자가 되고 있는 건가.

모든 자산이 뛰는 것은 인플레이션의 전형적 현상이다. 밀턴 프리드먼이 갈파한 대로 인플레는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 베네수엘라나 짐바브웨에 가면 그들 화폐로 억만장자, 조만장자가 즐비하다. 저수지에 물이 차면 모든 게 뜬다.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속에 세계 각국이 지난해 푼 돈이 13조달러(약 1경4300조원)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예산과 추경으로 지난해 570조원을 풀었고, 올해는 예산만 558조원이다. 돈이 흘러넘친다. 기업은 규제로 묶어놓고, 민생은 통금과 거리두기로 막아놨으니 돈이 어디로 가겠나.

자산가격 상승은 돈값 하락, 즉 ‘화폐 타락’의 완곡한 표현이다. 평균 20억원(세후 14억원)인 로또 1등 당첨금으로는 인생 역전은커녕 강남 아파트 한 채도 못 산다. 물가 상승률이 1%도 안 되는데 무슨 인플레냐고? 무상복지와 온갖 지원금 확대가 물가지표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밥상에 올리는 품목마다 앞에 ‘금’자가 붙고 있다.

돈의 힘으로 뜨는 강세장에선 누구나 착각에 빠지기 쉽다.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것이다. 조정·하락국면이 오더라도 그 전에 빠져나올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둑이 터지면 다 휩쓸려 내려간다. 그래서 사는 건 기술, 파는 건 예술 또는 마술이라지 않은가. 역사를 돌이켜봐도 뜨거울수록 후유증도 컸다.

대체로 큰 정부, 재정·복지 확대를 선호하는 좌파정부에서 화폐 타락의 개연성이 높다. 한 페친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 ‘무조건 빚내서라도 집을 사라’고 주변에 권유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때 폭등을 기억한다면 ‘시즌2’인 문재인 정부에선 집을 사는 게 합리적 선택임이 결과로 입증됐다. 본래 영화·드라마도 속편이 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법이다.

주식도 마찬가지다. 20~30대가 ‘영끌, 빚투’에 나선 것 역시 각자에게는 인플레에 편승하는 합리적 선택이 된다. 물론 내리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책임이다. 이를 망각하면 수업료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1980년대 말 ‘3저 호황’ 때는 ‘나보다 더 비싸게 주식을 사는 바보가 있다’는 얘기가 회자됐다. 하지만 요즘 개미들은 그리 어수룩하지 않다. 3류 정부, 4류 정치에도 세계 일류가 된 국가대표 기업들을 주로 산다. 다만 ‘시간’을 사야지 ‘조바심’을 사서는 안 된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일개미’들의 박탈감과 의욕 저하다. 한편에선 주식 투자로 한 달 월급을 쉽게 버는데, 일개미는 월급 디플레를 겪는다. 더 힘든 자영업자는 “월급이 그립다”고 토로한다. 소득도 소득이지만 자산 격차는 평생 못 메울 크레바스가 돼간다. 왜 인플레가 ‘입법 없는 세금’ ‘빈자의 세금’인지 실감하게 된다. 이제는 초저금리가 경제회복 수단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인플레는 곧 중앙은행 타락인 셈이다.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화폐를 타락시키는 것”이란 레닌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영원히 오르기만 하는 것은 없다. 최대 악재는 ‘단기 급등’이다. 워런 버핏의 재치 있는 비유처럼 물이 빠진 뒤에 누가 알몸으로 수영하는지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지구가 무너져도 홀로 살아남을 것이란 자기과신은 사춘기적 환상일 뿐이다. 물리학자 뉴턴도 예외가 아니었다. ‘투자’가 국민 스포츠가 된 지금 마크 트웨인의 명언이 자꾸 귓전을 맴돈다. “만약 당신이 다수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변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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