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 이수현 어머니 "한일 정부, 서로 조금씩 양보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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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후원·염려 덕분에 아들의 꿈 이어진다"…올해 20주기
"아들을 잃은 후 많은 일본 국민이 후원하고 염려해주신 덕분에 장학회가 운영돼 아들의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일본 유학 중 목숨을 잃은 의인 이수현(1974∼2001) 씨의 어머니 신윤찬(72) 씨는 아들의 20주기(周忌)를 엿새 앞둔 20일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 한일 양국 언론 공동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꿈꿨던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기부한 1억원과 일본 각계각층의 기부금으로 일본에서 'LSH아시아장학회' 사업이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들을 잃은 신씨에게 살아가는 보람이 된 셈이다.
LSH아시아장학회는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는 한국인과 동남아시아 유학생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올해 수혜자가 1천명을 돌파한다.
신 씨는 매년 아들의 기일에 사고 현장인 도쿄도(東京都) 신주쿠(新宿)구 소재 JR 신오쿠보(新大久保)역을 찾아갔다.
올해 신주쿠 한국상인연합회 등이 20주기를 맞아 고인을 기리는 제법 큰 행사를 공들여서 준비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신 씨가 일본에 오기 어렵게 됐고 행사도 소수만 참석하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신 씨는 "일본에 코로나가 너무 심해서 걱정이 많이 됐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추도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억누르듯 말했다.
그는 "조그만 행사라도 한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며 고인을 기리는 행사가 20년간 이어진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신 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20년간 일본에서 받은 편지는 2천통 정도라며 "이렇게 노력하는 분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슬픔을 좀 가라앉힐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까지 많은 일본인이 고인의 묘를 찾아왔고 그를 기리는 홈페이지에도 방문자가 이어지고 있다.
신 씨는 수교 후 최악의 상황이라는 평가를 받는 최근 한일 관계에 관한 생각도 조심스럽게 밝혔다.
한일 양국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신 씨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서로 힘들기는 하다"면서도 "서로 좀 한발 양보해서 양국 국민이 좀 살기 편안하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
그는 "가깝게 있다 보니 역사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가족으로 이어지고 기업으로도 이어지고 어느 나라보다 밀접한 관계가 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신 씨는 아들이 한일 우호의 증진에 기여하고 싶어 했다며 "힘이 다하는 날까지 교류 현장에 잘 (함께) 하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고려대를 휴학하고 일본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고인은 2001년 1월 26일 신오쿠보역에서 일본인 세키네 시로(關根史郞) 씨와 함께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남성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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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일본 유학 중 목숨을 잃은 의인 이수현(1974∼2001) 씨의 어머니 신윤찬(72) 씨는 아들의 20주기(周忌)를 엿새 앞둔 20일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 한일 양국 언론 공동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꿈꿨던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기부한 1억원과 일본 각계각층의 기부금으로 일본에서 'LSH아시아장학회' 사업이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들을 잃은 신씨에게 살아가는 보람이 된 셈이다.
LSH아시아장학회는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는 한국인과 동남아시아 유학생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올해 수혜자가 1천명을 돌파한다.
신 씨는 매년 아들의 기일에 사고 현장인 도쿄도(東京都) 신주쿠(新宿)구 소재 JR 신오쿠보(新大久保)역을 찾아갔다.
올해 신주쿠 한국상인연합회 등이 20주기를 맞아 고인을 기리는 제법 큰 행사를 공들여서 준비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신 씨가 일본에 오기 어렵게 됐고 행사도 소수만 참석하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신 씨는 "일본에 코로나가 너무 심해서 걱정이 많이 됐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추도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억누르듯 말했다.
그는 "조그만 행사라도 한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며 고인을 기리는 행사가 20년간 이어진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신 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20년간 일본에서 받은 편지는 2천통 정도라며 "이렇게 노력하는 분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슬픔을 좀 가라앉힐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까지 많은 일본인이 고인의 묘를 찾아왔고 그를 기리는 홈페이지에도 방문자가 이어지고 있다.
신 씨는 수교 후 최악의 상황이라는 평가를 받는 최근 한일 관계에 관한 생각도 조심스럽게 밝혔다.
한일 양국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신 씨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서로 힘들기는 하다"면서도 "서로 좀 한발 양보해서 양국 국민이 좀 살기 편안하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
그는 "가깝게 있다 보니 역사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가족으로 이어지고 기업으로도 이어지고 어느 나라보다 밀접한 관계가 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신 씨는 아들이 한일 우호의 증진에 기여하고 싶어 했다며 "힘이 다하는 날까지 교류 현장에 잘 (함께) 하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고려대를 휴학하고 일본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고인은 2001년 1월 26일 신오쿠보역에서 일본인 세키네 시로(關根史郞) 씨와 함께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남성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