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같은 당 장혜영 의원에 대한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25일 당 대표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사진은 김 대표가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 대표단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왼쪽은 장 의원.   국회사진기자단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같은 당 장혜영 의원에 대한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25일 당 대표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사진은 김 대표가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 대표단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왼쪽은 장 의원. 국회사진기자단
국가인권위원회가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비서를 성추행한 것은 사실이라는 내용의 직권조사 결과를 25일 발표했다. 피해자인 비서 A씨의 주장대로 박 전 시장이 A씨의 손을 만지고 늦은 밤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등을 보낸 게 맞다고 결론 낸 것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김종철 정의당 대표는 성추행 사실을 시인하고 전격 사퇴했다. 오는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권에 ‘성추문 악재’가 이어지고 있다.

“성희롱으로 판단하기 충분”

인권위는 이날 전원위원회를 열고 “박 전 시장이 업무와 관련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 등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조사 결과를 심의·의결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이 늦은 밤 A씨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를 한 A씨의 손톱과 손을 만졌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A씨의 휴대폰 디지털 포렌식 자료, 참고인들의 진술,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등에 근거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 사망으로) 피조사자가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어 일반적 성희롱 사건보다 사실관계를 좀 더 엄격하게 인정했다”며 “그럼에도 성희롱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봤다”고 밝혔다.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A씨는 박 전 시장이 샤워를 한 전후로 그의 속옷을 관리하고 혈압 재기, 명절 장보기 등 사적인 업무까지 수행했다. 인권위는 “서울시는 시장 비서에 20~30대 신입 여성 직원을 배치해왔다”며 “비서 직무는 젊은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고정관념이 반영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다만 인권위는 “서울시 비서실 직원들이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묵인·방조했다고 볼 만한 객관적 증거는 확인하기 어렵다”며 “비서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라고만 바라본,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문제”라고 강조했다. A씨가 고소하기 전 피소 사실이 박 전 시장 측에 유출됐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는 “경찰청 검찰청 청와대 등은 수사 중이라거나 보안 등을 이유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며 “경위를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권력에 취해 ‘나 좋아한다’ 착각”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정의당의 김종철 대표는 이날 같은 당 장혜영 의원을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김 대표는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에서 장 의원과 저녁 식사를 하고 헤어지기 직전 성추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당은 김 대표에 대해 직위해제를 결정했다.

진보 진영의 ‘성범죄 악몽’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비서 성폭행 혐의로 2019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6개월이 확정됐다. 지난해 4월에는 같은 당 소속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여성 공무원을 추행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퇴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보궐선거의 원인이 민주당에 있다는 점만으로도 진보 진영에 불리한 싸움이었는데 김 대표가 이를 한번 더 들춰낸 꼴이 됐다”며 “진보 진영, 특히 민주당에는 엄청난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계와 학계에선 “진보 진영 인사들이 인권과 성평등을 말로만 강조해왔지, 실질적으로는 성인지 감수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과거 운동권 내에선 ‘대의’가 우선이라는 이유로 성폭력 같은 ‘사소한 것’은 묵살해도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며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성인지 감수성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권력이라는 옷까지 입게 돼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인들의 잇따른 성추문에 대해 “권력을 쥐게 되면 상대방이 바로 대놓고 거부를 못하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했다.

김남영/김소현/최다은 기자 n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