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엄마 한국에 불렀으나 코로나19에 플라스틱 공장서 실직
남편은 중국서 용접일로 가족부양…안타까움 더해
'달동네' 덮친 화마…하루아침에 엄마·자식 잃은 필리핀 여성
31일 오전 3시 5분께 강원 원주시 명륜동 한 주택 재개발지역.
20여 채가 빽빽하게 모여 사는 일명 '달동네'인 이곳의 한 주택에서 불이 났다.

모두가 잠이 든 취약시간대에 동네를 덮친 화마(火魔)는 이웃 주택들까지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불은 필리핀 다문화가정인 A(32)씨 집까지 번졌다.

A씨가 화재 사실을 알아챘을 때 불은 현관문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높이가 허리쯤 되는 창문을 넘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A씨를 발견한 이웃 주민들은 A씨를 간신히 밖으로 빼냈다.

A씨는 주민들과 방 안에 남아 있는 엄마(73·필리핀), 딸(9), 아들(7)을 구하려고 했으나 불길은 너무 강했고, 결국 화마는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경찰 등에 따르면 A씨는 10여 년 전 한국으로 넘어와 가정을 꾸렸다.

명륜동에 4∼5년 전 이사 온 A씨는 다니던 플라스틱 공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어려워지자 수개월 전 일자리를 잃었다.

지난해 필리핀에 있던 모친을 한국으로 오라고 했으나 일자리를 잃으면서 어려웠던 생계는 더 막막해졌고, 남편은 지난해 중국으로 용접일을 하러 떠난 상태였다.

A씨는 1도 화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어버린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거의 반실신 상태"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불은 A씨의 아랫집에서 시작됐다.

아랫집에 살던 B(65)씨는 "잠을 자던 중 불이 확 나서 도망쳤다"고 진술했다.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이 도착했을 당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있었고, 사람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에 소방차는 진입할 수 없었다.

소방시설이라곤 20m 거리에 있는 소화전 하나가 전부인 상황에 대원들은 소방차 호스를 짊어진 채 굽이진 골목을 100m가량 올라 불을 꺼야 했다.

불은 A씨 주택 등 2채가 폭삭 주저앉을 정도로 모두 태우고, 주변 3채를 절반가량 태운 뒤 1시간 20여분 만에 꺼졌다.

이웃 주민 10명이 대피하기도 했으나 다친 곳은 없었다.

경찰과 소방은 석유난로 취급 부주의로 인해 불이 난 것으로 보고, 내일 오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감식할 예정이다.
'달동네' 덮친 화마…하루아침에 엄마·자식 잃은 필리핀 여성
/연합뉴스